일기에요

오늘의 일기

유 진 정 2017. 1. 11. 03:48

키보드가 고장났다. 

일전에 오작동의 낌새가 보이길래 새것을 주문하였으나 그 다음날부터 멀쩡히 잘되고 바꾼지 얼마 되지도 않은거라 새것을 반품시켰는데 마치 엿이라도 먹으라는 것처럼 출국한지 며칠 안되어 고장이 나 버린것이다.

키보드가 고장이나면 새것을 구입하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종종 키보드를 보며 타이핑을 하기 때문에 한글이 프린트 된 키보드가 필요하다. 외워서도 칠 수 있지만 자판을 내려다 보았을때 한글이 안 적혀 있으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외국에서 한글 키보드 찾기란 의외로 쉽지가 않다. 쥐마켓 해외배송이라는 옵션이 있었지만 일주일 동안 w키를 치면 we 라고 나오는 전체주의에 경도된 미친 키보드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태국 국내 인터넷 쇼핑몰을 찾아보았지만 한글 키보드를 판매하는 업자는 없었다. 대신 키보드에 씌우는 한글 실리콘 커버를 키보드의 3배정도 되는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옘병.. 인터넷 쇼핑은 포기하고 발로 뛰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고 방콕의 용산이라는 판팁플라자로 향했다. 몇년전 플라자 3층 구석탱이에서 한글 키보드를 팔고있었다고 한다. 

나의 숙소에서 시내까지 나가려면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나가 다시 운하보트를 타야한다.
일전에 버스 두번 갈아타고 + BTS(스카이트레인)를 이용하여 시내에 나간적 있는데 차가 개같이 막혀서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거의 세시간 (왕복 5시간반) 이 걸린 이후로 가능한 한 운하버스노선이 닫지 않는 지역엔 볼 일을 안 만들기로 했다. 다행히 판팁플라자는 운하버스노선에서 멀지 않은 곳이였다. 

운하버스를 타고 활람퐁역에 내려 판팁으로 가려는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판팁플라자라는 상호를 까먹어 버린 것이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걍 역에서 판팁플라자 유티나이카 하면 사람들이 가르쳐 주겠지 하고 지도 한번 훑어보고 슥 나왔는데 아무래도 운하버스의 시컴헌 디젤 매연에 뇌세포가 모두 파괴되어버린 모양이다. 

 

암튼 가기는 가야함으로 앞에서 걸어오는 너드같이 생긴 서양인에게 요 근처에 빅 일렉트릭 굿즈 쇼핑몰 어딘지 아느냐 물어보니 모른단다. 그걸 옆에서 보던 노점상 아저씨가 막 껴들면서 어디어디 이름을 말해봐 하는데 아니 아저씨 그 이름이 기억이 안나니까 문제인겁니다. 

넘 황당해서 일단 근처 갤러리 화장실에 들어간 뒤 기억을 쥐어짜냈다.
스스로가 싫어지려고 하는 시점에서 팬티를 올리는데 팬티.. 팬티? 그래 판팁!!판팁 플라자!!! 하는 식으로 기억이 퍼뜩 되돌아왔다. 팬티를 입고 나오길 정말 잘 했다. 

갤러리 가드에게 가는 방향을 물어보고 인포센터에서 지도를 한장 받아 밖으로 나왔다.
15분정도 걸으니 팬티플라자가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몇년전 여기 크리스마스 선물사러 온 적도 있는데 기억이 완전 삭제된것이 미스테리 

 

들어가서 한국어 키보드 파는 곳이 있냐 수소문 하며 다녔는데 아무도 모른다길래 걍 포기하고 전에 쓰던거처럼 슬림한 블루투스 키보드를 물색하며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 마주친 무슬림인지 인도인인지 암튼 카레냄새날것같이 생긴 아재가 헤이 섹시라며 입맛을 다시길래 머리 속에 데벨롭핑 컨츄리의 젠더감수성과 종교 뭐 이딴 단어가 떠올랐고 거기까지만 해라를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키보드를 계속 물색했다.

파는 물건은 거기서 거기였다. 까만색, 30센티 내외, 케이블 충전식, 블루투스 라는 조건을 충족하는 물건은 놀랍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한번 g마켓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였다. 

결국 490바트하는 aaa배터리가 들어가는 흰색 블루투스 키보드를 40바트 깎아서 구매하였다.
배터리 몇개들어가냐고 하니까 한개라고 했는데 뜯어보니 두개 들어가는 점이 별건아닌데 거슬린다.
설명서에는 충전케이블용 단자가 분명 그려져있는데 몬가 짝퉁같은 느낌이든다.
제품의 마감상태로 보아 짝퉁이 아마 맞을것이다. 뭣보다 브랜드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걍 박스에 와이어리스 키보드라도 띡 적혀있음. 원래쓰던 정품 키보드가 2만 얼마 했던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 별로 싸지도 않은 가격이군.. 불만족스러운 쇼핑이였지만 어쨌든 당장의 문제가 해결된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세븐일레븐에서 배터리를 구매하면서 보니 발등이 까졌길래 반창고도 같이 샀다. 

 

돌아오는 길에 마분콩에 잠시 들렸다. 현란한 색상의 led조명이 들어오는 조잡한 운동화를 들고있는 금발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곳에선 맨정신일때는 절대 구입하지 않을것 같은 물건들을 팔고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방콕에 있는 관광객들은 대체로 뭔가에 홀려있다고 해야하나? 정줄을 놓은채 지갑을 활짝열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파는것은 매우 신나는 일일 것이다. 말그대로 쇼핑의 천국 방콕인것이다.
일전에 사피엔스에서 읽은 -현대사회에서 부자의 계율은 투자하라! 이고 부자가 아닌 나머지 이들의 계율은 소비하라! 이다- 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피어근처에서 아까 그 노점상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찾던곳은 찾았니하시길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더니 내일 또 보자고 한다. 이짓거리를 한번 더 할 생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지친다.
표정과 손짓으로 으아아아니요 라고 말한뒤 피어로 들어갔고 곧 도착한 보트에 올라탔다.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라 그런지 물살이 거세서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꿈 중의 하나는 남극에 가는 참치잡이 배에 승선하는 것인데 물보라를 바라보며 잠시 참치잡이배위에 있는 상상을 했다.

이렇게 흐리고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날 갑판위에 배멀미없이 올라타 있을 수 있다면 어디까지나 갈수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것이다.. 그 순간 파도가 크게 한번 몰아쳤고 싼쎕운하의 똥물을 정면으로 뒤집어 썼다.
나도모르게 우엥!이라고 소리를 지른뒤 참치잠이 배에서 우엥 같은 소리를 냈다간 놀림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남극의 바닷물에선 똥냄새가 안날테니까 아마 우엥같은 소리는 내지 않을것이다. 

아까부터 뒷사람이 물막이를 낑낑거리며 올리고 있는걸 알고있었지만 물보라가 보고 싶어서 모르는 척 하고 있었는데 (물막이 손잡이 올리는 담당자리에 앉아있었음) 암튼 그래서 그만 깝치고 조용히 물막이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버스정거장이 있는 더몰 방까삐 피어에 도착하여 키보드 태국어를 가릴 흰색 스티커를 사야지 했는데 쏨땀이랑 치킨사먹느라 홀딱 까먹어버렸다. 맥도날드에서 음료수 하나 시킨 뒤 안면몰수하고 처묵처묵했는데 아침 대충 먹고 쭉 굶은지라 맛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키보드를 부팅시켰다. 와이파이는 여전히 1분단위로 끊긴다. 

니훈이라는 이름의 리셉션 레이디에게 와이파이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오늘로써 여섯번째 하는 똑같은 대화이다. 이제 주인도 이 사실을 알고있고 기계를 바꿀것이라길래 쓸쓸하게 웃으며 언제요..? 라고 묻자 쓸쓸하게 웃으며 대답을 안한다. 

수영장 문닫을 시간이 임박했길래 물속에 한번 뛰어들고 씻은 뒤 스티커사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두곳모두 스티커는 안판다. 잘라서 쓰려고 흰색 양면테잎을 사왔다. 그 위에 한글 자판을 적으려고 했는데 코팅이 되어 있어서 인지 펜이 안먹는다. ㅇㅋ그건 포기. 이쯤에선 포기가 빨라진다.

근데 가만보니 키보드 맵핑이 미묘하게 다르다. 잘보니 인터페이스가 맥용이네 쓰브랄

esc키가 없고 한영키 누르는 부분이 커맨드키인지라 좆나게 불편하다. 한영키를 무심코 누르는 순간 시작메뉴가 떠버리는것이다.

와이파이가 되는 타이밍을 노려 키보드 맵핑 프로그램을 다운받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작동하지 않는다. 다른 맵핑프로그램을 찾아 다운로드를 받으려는 순간 와이파이가 끊겼고 그순간 나도 모르게 새 키보드를 베토벤처럼 내려쳤다. 이 와중에 모기한테 이십방쯤 물린것 같다.

만약 내가 지금 밖으로 뛰쳐나가 아랍인을 쏴죽인 뒤 재판장에서 그 이유를 추궁당하게 된다면 나는 키보드가 고장나서 라고 답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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