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생일

유 진 정 2018. 10. 29. 13:34

생일은 이 비정한 세상에 타인의 의지로 인해 태어난것을 슬퍼해야하는 날이라는 모친의 신념을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그날마다 스스로에게 위로의 선물을 주기로 결정했다.

 

일전에는 GYM회원권을 끊어줬고 작년에는 옷을 한 벌 사 주었으니 올해는 봉사활동을 가기로 했다. 그동안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산거 같아서 반성의 의미로... 는 전혀 아니고 그냥 안해본걸 해보고 싶었음

 

10일 동안 명상원 주방에서 도비 노릇을 하다가 자유를 얻어 전주로 놀러갔다. 

데미안이라는 프랑스 청년과 함께했는데 전주는 이제 너무 많이 갔는지 재미가 없다. 게다가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한 두어시간 돌다가 데미안네 숙소 로비로 돌아가 기타를 치고 그가 내려주는 차만 벌컥벌컥 마셨다. 

나 오늘 생일이라니까 데미안이 밥을 사줬는데 오랜만에 튀긴 고기를 먹었더니 (명상원에선 채식함) 속이 약간 거북해졌다. 게다가 명상원에서 감기를 옮았고 보이차에 카페인이 들어있는지 모르고 열 잔 정도를 내리 마셨더니 아주 이상한 상태가 되었다. 몸은 제발 좀 쉬자 라고 하는데 뇌는 깨어라! 라고 하는 느낌

 

로비에서 만난 영국인 커플과 이야기를 한참 했는데 그들은 삼 년째 함께 여행을 하고 있고 남자의 직업은 목수인데 일년에 7주만 리버풀로 돌아가 일을 하고 그때 번 돈으로 해마다 장기여행을 한다고 했다. 여자쪽의 설명에 의하면 그 7주 동안 남자는 좀비의 형상으로 변한다고

 

기차시간이 되어 택시를 타고 역으로 향하는데 토할것 같아서 기사님에게 봉지가 있냐고 물어보니 없다며 창문을 열어주셨다. 껌이라도 씹겠냐시길래 참아보겠다고 하니 기사님이 지름길로 차를 몰아주셔서 붐비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빨리 역에 도착했다.

 

역 화장실에서 세번에 걸쳐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나니 쓰러질것 같았으나 오랜만에 생존본능이 발동하는 느낌이였다. 이 느낌은 사람을 매우 단순하게 만든다. 다음에 해야할 가장 적절한 행동을 매우 로보틱하게 결정할 수 있다. 양치를 하고 물을 마신 뒤 기차에 올라 좌석을 풀로 재낀 다음 곯아떨어졌다.

 

밤 11시 경 기차는 중간정차역에 도착했고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비몽사몽 눈을 떴다. 

방금 기차에 탄 듯한 패딩조끼를 코트 안에 받쳐입은 뚱통한 청년이 자리를 올려달라길래 그냥 좀 가면 안될까요? 하니 청년은 불편하니까 좌석을 올려달라고 재차 요청했다. 그래서 저는 이 만큼의 공간에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하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니 청년이 ' 뭔 개소리야........ ' 라고 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이 어느정도 깨면서 절대로 좌석을 안 올려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섰고 야옹야옹이라고 외칠껄 하는 아쉬움도 뒤따라왔다.  

 

곧 그의 여자 친구가 뭐래? 라고 물어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상황을 설명하며 분개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분노의 원인을 파악했다. 여친이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존심이 걸려있는 요구였던것이다. 

 

승무원이 도착하자 그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고 승무원은 그들에게 자리를 옮기라고 제안한 듯 했다. 그가 여자친구와 함께 자리를 옮기며 씨발 어쩌구 하는것이 들려왔는데 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왜 멍청한 애들이 빡쳐하는것을 보면 기분이 좋을까..?

 

잠시 후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역사의 밤공기는 차갑고 상쾌했다. 

박스로 솜씨좋게 만든 노숙자의 집은 집이라기보단 관에 가까운 모양이였다. 고통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와 환기를 하고 전기담요를 켠 뒤 행복한 마음으로 침대속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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