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약자 2

나다 2018.11.28 23:59

아저씨(엄마의 남편)는 좋은 사람이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령운동과 기도(?)를 하고 캄캄한 길을 걸어 출근을 한다. 


이 추운데 일이 힘들지 않소 엄마가 물어보면 하~~나도 안힘드네. 대답하는 아저씨는 늑막염 치료를 받느라 쉬던 두 달을 제외하면 근무-퇴근-바둑-식사-바둑-수면 이라는 일과를 철저하게 지키는 성실한 소시민이시다.  


아저씨의 아버지는 육이오때 동네에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돌아가셨다. 살길이 막막해진 아저씨의 어머니가 울며 붙드는 어린아들을 뿌리치고 재가를 하셨기때문에 아저씨는 할머니의 손에의해 길러졌다. 아저씨의 세 딸은 아주 멀리 살고 전 부인은 오래 전 돌아가셨음으로 아저씨도 엄마만큼이나 혼자라고 할 수 있겠다. 


외로운 존재 둘이 늘그막에 만나 맛있는것 해먹고 고만고만한 월급을 쪼개어 야금야금 저축도 하며 사는것을 보고 있노라면 배우자의 소중함에 대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깨닫게 된다. 둘에게 서로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 모습이 너무나 작고 가엾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둘은 오늘 하이마트에 갔다. 내가 그것을 알고있는 이유는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예의 그 스피커폰에 가까운 성량으로 " 유진아!!! 바빠???!! " 를 외쳤고 서류 쪼가리를 정리하던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채 뭔데. 라고 되물었다. 


엄마는 아저씨가 바둑을 못두고 있고 그 이유는 모뎀 (= 컴퓨터본체 ) 이 고장났기 때문이다, 라는 스토리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설명하였고, 

하이마트에서 모뎀 (=컴퓨터본체) 을 구입하려고 하니 네가 전에 맞춰준 가격의 세 배 가까이나 하는데 이 가격을 주고 사는게 맞는거냐 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나는 왜 컴퓨터 본체를 모뎀이라고 불러서는 안되는가에 대한 설명을 백한번째로 한 뒤 

일전에 방문했을때 넷마블 바둑이 자꾸 튕긴다는 아저씨의 불만제기를 접수하고 내가 포멧을 한적이 있는데, 그때까지 멀쩡하던 컴퓨터가 갑자기 그럴리가 없으니 증상을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한 다음 그들을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이 둘이 컴퓨터로 무엇을 하고있는지 아주 잘 알고있다. 


넷마블 바둑과 레시피 검색.

그 컴퓨터가 예외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일전에 내가 토렌트로 미드와 추억의 팝송100선을 불법다운로드받고 포토샵으로 아저씨의 증명사진을 조금 뽀샤시하게 수정한 그 때 뿐이다. 

그런 둘이 백여만원짜리 고사양 컴퓨터를 그것도 하이마트에서 구입하게 내버려둘 수 는 없었다..! 


두시간 후 전화가 왔고 영상통화의 개념과 페이스톡의 사용법에 대하여 한 차례 강연을 펼친 뒤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는데 성공했다.  


과년한 나이에 고양이 귀 머리띠를 하고 있는 딸의 모습이 그들에게 충격을 주진 않을까 잠시 근심했으나 고장난 컴퓨터라는 중대사항 앞에서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그들의 안중에 없는 듯 했다. 아무튼 나는 드디어 컴퓨터의 화면을 내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포멧 후 윈도우 시작 시 비번입력 방식이 바뀌었는데 아저씨가 비번을 잊어버리셨고 그로 인해 이메일, 또는 전화로 인증코드를 받으라는 낯선화면이 등장하자 그 둘은 패닉에 빠졌던 것이었다. 


이 상황이 컴퓨터를 사버리자. 라는 결론으로 전개되기까지는 무수한 헛된 시도와 좌절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컴퓨터는 전혀 고장나지 않았으니 안심하시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이제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아저씨가 비밀번호를 기억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아저씨가 자신은 비밀번호를 틀리지 않았다, 사용하는 비밀번호라고는 하나 뿐인데 어떻게 틀릴 수가 있겠는가?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바람에 일전에 넷마블 비밀번호 틀리시는걸 내가 목격한 바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했다. 


중꿔발 해킹을 우려한 대부분의 웹사이트들은 이용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비번을 바꿀것을 요구했고, 그때마다 특수문자 추가 등의 옵션은 늘어만 갔으며, 그래서 아저씨는 평생 쓰던 친숙한 비번에 낯선 글자들을 추가해야만 했던것이다. 그리고 자동 로그인 시스템이 바뀐 비번에 대한 아저씨의 기억을 말끔하게 포맷시켜버리곤 했다.


아무튼 아저씨는 윈도우 비번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나는 약간의 책임의식을 느꼈다. 비번 뭘로 하실거예요~ 어~0000로 할까~ 라는 대화를 왜 기록해두지 않았던것인가? 대답을 하는 아저씨의 시선이 바둑TV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았었던가! 


이제는 추리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했다. 여러개의 의미있는 숫자와 기호등이 등장했고 수차례의 실패끝에 나는 포맷의 주체가 나였으니 어쩌면 내가 아저씨에게 비번의 형식을 추천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냥 숫자 네개가 아닐가요? 그 문자 뒤에 항상 덧붙이시던 숫자 네개만 입력해보세요



****



우리는 성공했다. 

환호하는 엄마를 옆에두고 아저씨가 멋쩍은 얼굴로 그래 끊자아~ 를 외친 뒤 페이스톡은 종료되었다.

아저씨의 넷마블바둑이 내공은 오늘 밤도 차근차근 쌓여갈 것이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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