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요

병원스케치

유 진 정 2020. 9. 15. 18:06

올해부터 스스로를 중년 카데고리에 집어넣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병원방문이 잦다.

처음으로 조직검사라는 것을 해보았고 수술날짜를 잡았다. 병명은 비밀이고 죽을 병 되기 전에 와서 다행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렇고 반대로 생각하자면 또 그렇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음.

막 토막살해당하기 이딴거 아니면 신상에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좋고 나쁨이 모호할때가 많기 때문에 걍 맘에 드는 쪽으로 정신승리하면 되는거 같음

 

사실 조직검사날은 개같이 우울했는데 그것은 PMS탓으로 판명되었고 재검진날은 쓸때없이 업되어서 쥐새끼들로 저글링을 할 뻔했다. 담당의사가 박해일을 닮았고 말투가 나긋나긋 눈망울이 그렁그렁함 

 

대학병원이라는 곳은 신기한 장소였다. 외국인 아기 노인 남자 여자 등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번쩍거리는 부분과 닳아 없어진 부분들이 혼재하였으며 수속절차가 복잡했다 (코로나도 한 몫을 했음)

노인이 되면 혼자 일처리하기 힘들겠군, 이라는 생각을 하며 차례를 기다리는데 왠 할머니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선생님, 나 이것 좀 봐줘요.. 뭔소린질 도통 모르겠네, 하며 숫자와 의학용어가 빽빽히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검사항목. 저건 보험공단에서 커버해주는 금액이고 이건 할머니가 내신 금액인거 같아요. 하니, 

 

아니 내가 앞으로 돈을 얼마나 더 내야되는거냐고 물으니까 저 놈이 말도없이 이 종이만 내밀었어! 라며 주름진 손가락을 뻗어 창구의 앳된 남직원을 가르킨다. 

 

그건 이거 봐도 모르겠는데요? 왜 그랬지? 하니

저놈이 애기(신입)인거 같아! 라고 불만을 표하신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할머니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들고 확인하니 티안나게 겹쳐진 뒷장이 있었다.

 

-아 여기 적혀있네요. 지금까지 내신 돈 780만원. 앞으로 내셔야할거 백십이만얼마. 그 사람 참 여기를 보라고 말이라도 해주지

 

-그러니까 저놈이 애기라 뭘 모른다니까.. 아무튼 미안해요. 나는 모르는건 꼭 알고 싶어가지구, 남들을 귀찮게해.

 

-모르는걸 알고 싶어하는건 아주 좋은거니까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어쨌든 내실 돈은 이제 얼마 안남으셨네요   

 

- 그럼~ 얼마나 열심히 갖다 바쳤는데~ 

 

라는 말을 끝으로 할머니는 환자답지 않은 상쾌한 걸음으로 슈슈숙 사라졌다. 

할머니에게 잘난듯 이야기 했지만 어리버리한것은 초행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러사람들을 조금씩 귀찮게 한 끝에  접수에 성공했다.

 

진료실에 도착하여 다시 수속을 밟고 차례를 기다리니 이번엔 더벅머리 초딩 남자애가 뛰어들어오며

허00! 허00! 죄송해요! 늦었어요!! 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다.

 

덕분에 간호사들이 빵터졌고 연상의 여인들을 웃겼다는 사실에 도취된 남자아이는 신이 나서 TMI를 쏟아내었다.

근데 사실 허00는 제가 아니라 우리 엄마고요~ 엄마는 주차를 하고 있고요~ 저희는 먼데서, 00, 00시에서 왔어요 블라블라 

장광설을 펼치다 뒤따라온 모친에게 붙잡힌 초딩은 자리에 일단 앉았으나 엄마가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즉시 옆의 할머니와 수다를 떨기시작했다. 처음엔 신선해서 귀를 기울였는데 애가 너무 관심을 갈구하니까 좀 싫어졌다.

할머니에게 제가 누군지 아세요? 유튜버 크리에이터 000라고 들어는 보셨어요? 라고 큰소리로 외칠때 얘는 친구가 없을것 같다고 혼자 잠깐 생각함

 

암튼 본관과 신관의 각층을 오가며 별의별 검사를 하고 상담하고 수납하고 또 수납하고 사람구경하고 입원수속 밟고..

집에서 9시 반에 나왔는데 오후 두 시쯤 모든 과정이 끝났다. 

여기저기 구멍나고 정신없고 목돈들고 했지만 흥미로운 경험이었음. 앞으로 갈날이 몇 번 더 남았는데 아마 세번째 정도 되면 가기 싫어질듯..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