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장례식

유 진 정 2021. 4. 20. 00:01

이달 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소식이긴 했으나 향년 86세로 가셨으니 천수를 누리고 가셨다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 호적이 잘못되어 공식적으로는 96세에 돌아가신 셈이 되었다.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을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헉 엄마 어떡해'
두번째로 든 생각은 '헉 큰이모 어떡해' 세번째는 '막내이모는 어떡해' 였다.

모친의 경우 해묵은 갈등으로 인해 지난 1년간 외할머니와 척을지고 지냈기 때문에 속이 상할 테고
큰 이모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외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음으로 상실감이 클 것이고
가장 사랑을 받았던 막내이모는 코로나로 인해 입국가능여부가 불확실한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산사람들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니 감정은 뒷전이 되었다.
막내이모의 입국은 역시나 불허되었다. 엄마는 크게 울고 큰이모는 작게 울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가격이 붙었다.
사망진단 25만원 화환 70만원 식사비용 120만원 납골당 350만원
삼선슬리퍼 만원 종이컵 한 줄 만원

취약해진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70만원짜리 화환엔 병원 분향소의 삭막한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트리는 효과가 있었다.

분향소에서 우는 여자들에게 휴지를 건넬때까지만 해도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는데
입관하시는걸 보고 나서야 아 할머니가 죽었구나 싶었다.
시신을 둘러싼 두 중년 여성이 엄마 엄마를 외치며 오열하는 모습은 보고있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반면 돌아가신 분의 표정은 평온 그 자체였다.
나는 손을 뻗어 시신의 뺨을 만져보았다. 묻어나올 것처럼 부드럽고 차가웠다.
구정때 할머니의 팔뚝을 잡아보았는데 지나치게 부드러운 나머지 생기가 빠져나간 느낌까지 들길래 노화란 이런거구나, 생각했던게 떠올랐다.
할머니의 몸은 너무 작아서 관안에 완충제를 잔뜩 집어넣어야 했다.

장례지도사는 우리에게 세균이 묻었을 수 있으니 꼭 손을 씻으라고 권유했다.
셋이 나란히 화장실에 서서 말없이 손을 박박 씼을땐 상황이 희극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입관식을 끝낸 뒤 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 무엇인가 궁리하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찬송가를 물어서 틀었다.
슬픔과 회한이 난무하는 곳에서 종교와 예술은 꽤 도움이 되었다.

둘쨋날 할머니의 남동생이 어글리 슈즈를 신고 마산에서 올라오셨다.
큰 금액의 부조를 한 뒤 아이처럼 울고나자 그는 곧 진정되었다.

어릴땐 엄마 같고, 나이 들어선 누나 같고, 늙어서는 친구 같던 사람이었지

라고 할머니를 회고한 마산 할아버지는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옛날 이야기에 대해 자꾸 물어보자 그는 ' 미안하다. 내가 생태탕집 아들이 아니라 안나는 기억이 꽤나 많다. '
라는 대답으로 나를 거의 폭소하게 만들뻔 했다.

유지이(유진이), 너는 예수님 믿냐?
아니오.
라고 대답하자마자 코너에 앉아있던 큰이모가 ' 걔도 돌아올거에요, 곧! ' 이라고 단호한 말투로 외치길래
더 큰소리로 '아멘!!' 이라고 외쳤다.

그쯤에서 사람이 24시간 내내 슬퍼할 수는 없는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끼리 모이니 농담도 나오고 돌아가신 분의 흉도 나오고 , 다시 울다가 갑자기 식당 반찬 맛 논평을 하고
뭐 그런식으로 삼일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마산 할아버지는 서울 수돗물은 믿을수가 없다며 생수로 양치를 하셨다.

화장터에는 추모의 글을 적는 화이트 보드가 마련되어 있었다.
할머니 안녕히 가시고 꿈에 나타나 로또번호 좀 불러달라는 손자의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추모의 글을 지워지는 화이트보드에 적게 한다는 점에서 효율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정서를 느꼈다.

사진을 계속 찍다가 엄마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촬영은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최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놓는 것이 내 방식의 추모라고 생각했다.

가족 외의 사람을 부르지 않았고 할머니가 사회활동을 하시던 분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본 50인분을 주문해야 했던 밥이 많이 남았다.
남은 가족들은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정차된 버스 안에서 포장해온 남은 밥들을 열심히 해치웠다.

화장이 끝나자 안그래도 작던 할머니의 유해가 전기밥솥만해졌다.
사촌동생이 영정을 들고, 이모부가 유골함을 들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랐다.
버스 맨 앞자리에 영정과 함을 놓고 안전벨트까지 채운 뒤 납골당으로 향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나머지 취향이 나쁘다고까지 느껴지는 납골당이었다.
절차에 대해 안내를 받은 뒤 미리 와 있던 목사님과 약식 예배를 드렸다.
유골함을 넣고 드릴로 봉인하는 순간 엄마와 이모가 마지막으로 울었다.

집에 도착 후 쥐장 청소를 하고 쓰러져 잤다.
다음날 사진을 정리해 보내달라던 사람들에게 전송하고 나자 그제서야 뭐가 끝난 느낌이었다.

슬프진 않은데 생전 할머니가 주신 물건들이 눈에 띌때마다 기분이 좀 이상하다.
화분과 꽃무늬 종지, 접시, 냄비, 손거울 등 방문할때마다 자잘하게 뭘 하나씩 받아왔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만났을땐 어디서 찾아오셨는지 자전거 젤 안장패드를 내미셨다.

감정 표현이 적은 분이셨지만 옷은 화려한 걸 좋아하셨다.
엄마가 사드린 꽃무늬 블라우스에 반짝이가 적다고 더 반짝거리는 것으로 교환을 하셨다고 한다.

무능한 선비였던 부친과 생업전선에 나서야했던 모친덕에 아홉살때부터 주방을 책임져야 했다고 들었다.
키가 작아 아궁에 올라가 밥을 지었다고

외할아버지가 노쇠하시고 나서는 세무소 구내식당에서 밥을 하셨다.
은퇴 후에는 출퇴근 하는 이모를 위해 밥을 하셨다.

왜 나는 맨날맨날 남들 밥만 해야 하냐고 푸념을 하셨지만 다른 사람이 밥 하는 꼴은
맘에 안들어서 못 두고 보셨다고 한다.

이제 밥 안해도 되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