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요

터미널 풍경

유 진 정 2022. 4. 10. 21:27

고속버스를 기다리면서 대각선 앞 쪽으로 둥근 벤치 하나씩을 각각 차지하고 앉은 두 중년 남녀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동창 또는 가깝지 않은 친구 사이로 보였는데, 금반지를 여러개 낀 아줌마는 목소리가 컸고 말을 끊임없이 했다.

친구가 형편이 안 좋아지니까 주변에 사기를 치고 다닌다, 자기한테도 속옷을 백만원에 팔았다, 그래서 뭐, 사줬지 그냥 달라면 줘도 되는거였는데.. 하자 아저씨가 뭔 속옷이 백만원이냐고 되물었고
아줌마는 여자 속옷은 원래 그렇다. 천만원짜리도 있다. 하니 아저씨는 허 또라이같은! 이라고 응답했다.

아저씨는 대화(?)내내 정면을 바라보며 아줌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아줌마는 반대로 몸을 아저씨 쪽으로 한껏 기울여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허리 보정 속옷이라 비싸다, 보정이 되는 줄 알았는데 안되더라 하고 계속해서 속옷 이야기를 이어가자 아저씨는 묵묵부답으로 응수했다. 그러나 아줌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돈을 지불한 다른 재화와 서비스들에 대해서도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했는데,
특이하다고 생각했던건 모든 것의 액수를 꼭 붙여 말했다. 80만원, 15만원, 30만원

지루하고 너절한 단어들이 나열되기 시작하자 안그래도 시원찮던 아저씨의 반응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돌고돌아 아줌마가 다시 속옷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아저씨는 벌떡 일어나 전광판을 향해 걸어갔다.
버스 시간을 확인 하는둥 마는둥 하더니 근처에 서서 뭔가 할 일이 있는 것 처럼 서성이며 돌아오지 않았다.

상대를 잃은 아줌마는 이제 상반신을 좌우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왼손에 낀 반지를 오른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고 발을 까닥까닥, 병을 꺼내 물을 마신 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 의자에 앉은 자세도 잘 보니 마치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단거리 육상 선수마냥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만 있었다.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까. 말을 하거나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종류의 불안이 그녀를 덮쳐오는 걸까, 생각하다 버스시간이 되어 일어났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