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과 농장의 추억

생물이예요 2022. 4. 16. 04:41

운동을 나가는데 문 앞에 모종 택배가 와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 운동 제끼고 모종박스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비옥한 로쥐 화분에는 루꼴라를 심고 옆 화분엔 케일과 바질을 심었다. 가로쥐 묻을때 까마귀 같은게 파먹을까봐 왕창 깔아놓은 돌을 한참 골라내야 했다. 

엉거주춤한 스퀏 자세로 앉아서 흙속의 돌을 파바박 빠르게 골라내는데 어딘지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호주 농장 노가더를 할때 느끼던 충만함

..을 100분의 1정도로 희석시킨 느낌ㅎ

 

 

농장일은 지저분하고 고되고 큰 돈을 벌 수도 없었지만 좋아했기 때문에 2년 내내 장소를 옮겨가며 계속 했다.   

차가 없을땐 일 끝나고 픽업차량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럴때면 야트막한 흙언덕에 기대 누워 타바코 한 대 말아 피우며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구경했다. 

끝없이 넓은 농장 위로 펼쳐진 회색 구름을 바라보며 흙과 풀냄새를 실은 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어쩐지 경건한 마음마저 드는 것이었다. 

 

농장에 딸린 공장들도 나쁘지 않았다.

점심시간엔 식당을 빠져나와 공장 외벽에 기대어 높게 쌓여있는 팔레트 위로 기어올라가 샌드위치를 먹었다. 다 먹고나면 내려와 오렌지 나무 밑에서 쉬었다.  

캡시컴 공장에 다닐 때 일끝나고 픽업 버스가 두 시간 정도 늦게 오는 바람에 혼자 공장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묶여있는 경비견을 만난 날도 기억난다.

그레이트 데인의 잡종으로 보이는 거대한 강아지였는데 훈련이 덜 되어 있는지 사람을 만나자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다가가서 쓰다듬으니 맹렬하게 기뻐했다. 

문제는 흥분한 개가 어깨에 앞발을 걸치려고 들자마자 내가 바로 쓰러졌다는 것인데 (두 발로 서자 나보다 키가 컸다)

한번 개의 힘을 체험하고 나니 갑자기 두려워졌다. 후다닥 기어서 개 목줄의 사정거리 밖으로 피신했는데 문제는 내 남색 운동화 한 짝이 개의 옆에.. 

개는 왜 놀아주지 않냐며 끙끙거렸지만 그 괴수놈의 바운더리 안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잠깐 고민하다 근처에서 나무막대를 주워와 반대쪽으로 던지고 개가 그 쪽으로 뛰자마자 후다닥 가서 신발을 주워왔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스릴을 느꼈고 낑낑거리는 개에게 입장을 설명한 후 작별을 고했다. 

 

지미의 농장에서 일할 때 만난 S아주머니도 생각난다.

60대 후반 정도 되는 나이의 작고 마른 호주 여성이었는데 사람이 터프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이 있었다. 

반면 지미의 가족들은 영혼이라곤 보이지 않는 짐승의 푸른 눈을 가진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들은 동네에서 평판이 몹시 좋지 않았지만 우리 그룹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지미는 특히 르티샤와 나를 좋아했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프랑스언니 르티샤는 그런 지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았고 나는 속으로 좀 쫄면서 지미의 개드립을 맞받아치곤 했다.  

하루는 지미가 나를 숙소로 데려다 준 적이 있는데 운전을 하면서 잭콕 여섯 캔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왜 이러는 거냐고 하니 이게 이 동네 국룰이라며 우겼다. 이 지미의 농장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다음 번에 적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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