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것에 대한 애착

리뷰예요/물질 2022. 4. 18. 21:40

수년 동안 가족의 발이 되어주던 맥스를 폐차해야 했을 때 엄마는 눈물이 났다고 했다.


맥스는 이렇게 생긴 디젤 픽업트럭이었다.

사진 검색하다 들어간 사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최초의 시판용 디젤 픽업트럭이며 연료 경제성 때문에 용달과 자영업자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고

부친이 카센터를 운영했기 때문에 집에 차가 몇 대 있었는데, 그 중 맥스를 주로 이용했기 때문인지 가족들은 맥스를 편애했다. 나 역시 이 차를 좋아했다.
당시의 도로 교통법은 지금보다 느슨하게 지켜졌다. 친척들과 성묘를 갈 때 맥스의 짐칸에 앉아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을 맞으며 즐거워 하던 것이 기억난다.


케언즈 여행 중 B와 돈을 모아 호주를 떠나는 프랑스 커플로부터 캠핑 왜건을 샀다.

B가 자기나라 러너스 드라이버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둘 다 무면허였는데 프랑스 커플은 차가 너무 팔고 싶었는지 법적인 부분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델명은 89년식 홀덴 코모도어. 하늘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무거운 차였다.
에어컨은 없었고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열어야 했다. 뒷좌석에 매트릭스가 설치되어 있어 우리의 이동식 집이 되어 주었다.

차를 산 첫날 주차장에서 시운전을 해보고 나니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살면서 두번째로 잡아본 핸들이었다.

첫번째 운전 역시 무면허 상태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마 열한 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업으로 중고차 매매를 하던 부친이 곧 누군가에게 팔릴 예정인 빨간 프라이드를 집에 몰고와 나에게 운전을 가르쳤다.
부친의 수퍼바이징 하에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을 열바퀴 도는 정도의 간단한 운행이었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무튼 무면허로 차를 산 것에 대한 업보인지 구입한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차는 고속도로 위에서 몇 번이나 섰고,
더 이상의 매몰 비용을 늘릴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우리는 보웬의 어느 쇼핑몰 주차장에 차를 버리기로 했다.
나중에 합류한 메카닉 D가 우리 차의 상태를 보자마자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던 것도 그 결정에 한 몫을 했다.

차는 두고왔지만 어쩐지 버릴 수가 없어서 키를 한국까지 가지고 왔다.


두 번째 차도 당시 함께 여행하던 J와 돈을 모아 공동으로 구입했다. 마쓰다에서 1994년 출시한 파밀리아라는 흰색 세단이었다.

그동안 면허를 따뒀지만 이번에도 결과적으로 무면허 운전을 한 셈이 되었다. 왜냐면 면허는 오토로 땄는데 차가 메뉴얼이라.. 덕분에 수동차 운전법을 배웠다.

목장 출퇴근 용으로 구입한 것이라 다행히 도시로 몰고 나갈 일은 없었고 타운에 장 보러 갈때는 J가 운전을 했다.

우리는 2교대로 일을 했고 숙소에서 목장까지 가는 길은 산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출근할 때마다 서로를 데려다 주곤했다.
매일 하다보니 수동 운전에 꽤 재미를 붙이게 되었지만 캄캄한 새벽 산속 경사로에서 시동 백번 꺼먹었을 때는 크락션에 머리를 박고 잠시 울었다.

연식에도 불구하고 튼튼하고 잘 달리던 이 일제 차를 우리는 상당히 좋아했기 때문에 둘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낡은 맥스를 폐차하던 날 엄마는 상당히 감정적 반응을 보였고 코모도어의 키는 지금도 내 도구함에 들어있다.


인간은 물건들 중에서도 탈 것에 유독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 같다. 아마 초기문명의 운송수단이었던 말과의 관계에서부터 기원된 심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석기 시대의 말은 식용으로 길러졌었다고 한다.
고기로 소비되던 말의 다른 기능을 눈여겨본 누군가가 원시적인 기마술을 익혔을 것이고,
그것이 발전하여 이 강한 동물은 운송수단으로 기능하다 전쟁에까지 이용되게 되었다. ( 무기로서의 기능이 운송수단 보다 먼저였을 수도 있을 거 같다 )

그렇게 생각하니 탈 것에 대한 애착이 단번에 설명되었다. 잘 드는 칼과 마찬가지로 유능한 말은 소유자의 생존에 매우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질주의 쾌감 역시 한 몫을 했을 것 같다.
길들여 올라타자 마자 단번에 높아지는 시야, 더 멀리, 더 빠르게 이동하며 바람을 즐겼을 최초의 라이더를 생각하니 단편 스토리가 하나 그려지는데..

고기로 소비되던 말과 애착을 형성하게 된 소년이 기마술을 익혀 육용 말의 해방을 가져오고,
그것을 눈여겨 본 부족의 전사가 타 부족과의 전투에 말을 이용하기 시작하여 말들은 이름을 부여받는 등 또다른 가치를 지니게 되지만,
결국 소년이 사랑하던 말은 적의 화살에 꿰뚫리게 되고, 형태가 달라져도 착취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죽은 말의 고기를 부족원들과 나눠먹는 장면으로 끝나는 뭐 그런ㅎ

이 모든 생각들은 전기 자전거 브레이크 세팅을 조정하다 떠올랐다.
요새 유튜브 보면서 간단한 정비법들을 배우고 있는데 상당한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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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0 : Comments 6
  1. ㅇㅇ 2022.04.19 14:11 Modify/Delete Reply

    날좋은날 탈것타고 음악들으며 돌아댕김 그리좋죠
    뭘 타던간에

  2. 기린씨 2022.04.19 22:36 신고 Modify/Delete Reply

    융의 꿈 분석에서 자동차는 자기 자신으로 해석 되곤 하더라구요. 탈것은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발 같은 존재로, 신지와 에바 같은 연결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3. ㅇㅇ 2022.04.20 12:38 Modify/Delete Reply

    저희 어머니는 오래쓰신 세탁기 버리실때 세탁기한테 엄청 애틋한 작별인사를 하셨어요. 당시에 오빠랑 저는 엄마의 진지한 모습에 그냥 웃기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엄마도 비슷한 감정이었나봐요.

    • 유 진 정 2022.04.20 17:14 신고 Modify/Delete

      탈모자 떠서 커피머신에 씌워 놓았다는 어머니 생각나는 글이네요 엄마들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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