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움바 경찰서에의 하룻밤. 오페라하우스에서 나리타공항 까지 Sydney,Toowoomba,Pittsworth 2007/5,6,7,8

여행기예요/OZ 2011.12.08 23:52

사과주스와 함께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우리는 보웬에서도 결국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데니스 일행은 다른 농장지역으로,
나와 이지는 맥카이 라는 중소도시를 거쳐 시드니로 향했다. 

보웬에서 맥카이로 가던 중 고물 코모도는 고속도로 위에서 4번 정도 시동이 꺼졌고 생명의 위협과 인내력의 한계를 느낀 우리는 맥카이 쇼핑몰 주차장에 차를 버리고 버스로 시드니로 왔다. 
 
한국에 있을때는 시드니가 호주의 수도라고 철썩같이 믿고있었는데 알고보니 멜번과 시드니의 박터지는 수도탈환 경쟁끝에 캔버라 라는 계획도시를 하나 만들어서 그곳을 수도로 정했다고 한다. 그 스토리도 무언가 호주스럽다.

남쪽인 시드니는 햇볕은 좋았으나 제법 쌀쌀했다. 이 곳에서는 4주가량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의 며칠 빼고는 있는 내내 정말, 정말 지겨웠다!
 
일자리도 구해지지 않았고 그나마 일 구하기 쉬운 한인업소는 시간당5불,7불,끽해야 10불.. 
법정 최저임금 에도 한참 못미치는게 어찌나 괘씸하던지.
호주 한인 사업자들 워홀비자 덜렁 들고 오는 젊은 애들 다루는 걸 보고 있으면 완전 벗겨먹는 수준이다.
심지어 워홀러들한테 ABN(사업자등록번호) 받게 해가지고 사업자가 내야하는 세금까지 워홀러에게 뒤집어 씌우는 경우도 봤다.
물론 안 그런 사업주도 있겠지마는 1년 내내그런 모습을 지겹게 듣고 보고있자니 말이 좋게 나오질 않는다.
답답한 건 그런 대접 받으면서도 그 밑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무지렁이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변명으로, 농장일은 힘들다는 변명으로  도시 한구석에서 시간당 7불받고 개같이 일하는거.
그렇게 살면 화병 안나나? 난 날 것 같은데.

이 나라 노동자 보호법도 잘되어 있어서 신고하면 그간 못받은 돈 다 받아낼 수 있다. 
혹시 얘네가 못받아주더라도 고용주에게 니네 신고했어 or 신고할테다 말하면 서둘러 입금해 주는 경우도 있고 

Fair Work Ombudsman. 
이곳에 신고하면 된다.
웹사이트 주소: www.fwo.gov.au  전화: 13 13 94(한국어통역 13 14 50)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주저말고 전화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기 바란다.
올해 중반 나와 남자친구도 돈 때먹으려고 수작부리는 농장 컨츄렉터 때문에 전화한 적이 있었는데 해결해 줄테니 사건 경유 적어서 보내라고 서류 우편으로 바로 보내 주더라. 


밤의 오페라 하우스.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했다.
잠입을 시도했으나 5분만에 출동한 세큐리티에게 쫓겨남
 

코알라 포크리프트




오랜만에 큰 도시에 나오니 곧바로 감기에 걸렸다. 코밑도 죄다 헐고 아아 도시는 싫여...
 
시드니에서는 시티 중앙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플랫을 구해 살았는데 
방두개 거실하나 아파트에서 무려 10여명이 함께 살았다. 말로만 듣던 거실 쉐어, 베란다 쉐어를 그 곳에서 목격했다. 
아무리 땅덩어리가 넓다지만 이 나라도 도시의 주택난은 심각하구나 싶었다. 
















포썸 코안에 얼굴있다






























이곳에서는 밤마다 골목골목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남반구 최대의 환락가 킹스크로스 에서는 마약에 취해 다리를 오징어처럼 흔들어대는 여자를 보았다.
차이나 타운에서는 중국인 특유의 계산법으로 바가지를 썼다.
중식당의 밥은 양도 많고 무지무지 맛있었다. 중국사람들 밥을 많이 먹어서 목소리가 큰가?
빈둥대다 보니 몇주가 금방 흘렀다. 

우리가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데니스와 일행들이 퀸슬랜드의 피츠월스Pittsworth 라는 아주 작은 마을 브로콜리 농장에서 일을 구했다고 연락이 왔다. 
이지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되어있어서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다시 브리스번으로 날아갔다. 
브리스번에서 버스를 타고 투움바를 경유하여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피츠월스에 도달하는 루트였는데

저녁 8시의 투움바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고스트 타운이 따로 없었다. 
한국의 중소도시를 기대한 것이 화근이였다. 
26킬로그램짜리 짐을 끌고 비를 맞으며 온도시를 돌아다녔으나 숙박업소를 찾을 수 없었다.
딱하나 열려있던 호텔은 하룻밤에 140불. 아 그렇습니까 하고 바로 나왔다. 졸지에 노숙을 다시 하게 생겼다.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더운 곳에서 친구들과 텐트 치고 하던 노숙과 추운 곳에서 홀로 맨몸으로 하는 노숙은 같은 노숙이라도 차원이 달랐다.
눈물을 삼키며 주차장에 담요를 세팅하려 하는데 저쪽에서 꼬인 혀로 누가 나를 불렀다.
 
" 여 아시안걸 거기서 뭐하냐 "
 
주차장에서 술마시던 젊은 애들이였다. 순간 도망갈까 하다가 용기를 내어 나의 사정을 최대한 불쌍한 얼굴과 함께 설명하니 자기들 차로 주변에 숙박업소를 다시 한번 찾아 보자한다. 모텔은 결국 찾지 못했지만 경찰서에 나를 내려주어 안전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주머니에 들어있던 비상식량 치즈버거를 주었다. 



 

고마운 사람들
 

머물게 해주신 경찰아저씨도 감사합니다.. 근데 경찰서 안 인간적으로 너무 추웠다. 



그렇게 도착한 핏츠월스에서 데니스 포츈 데이빗..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니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우리의 숙소는 수완 좋은 여주인이 경영하는 작은 모텔이였고 그 여주인이 브로콜리 농장과 고기 공장에 일거리를 소개시켜주는 식이였다. 데니스가 미리 말해놓은 덕분에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동네는 거의 매일 비가 오는 우울한 날씨였는데 그것이 브로콜리에게는 또 좋다 했다. 날이선 칼로 브로콜리의 모가지를 댕겅댕겅 자르는 일은 나름 재미도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뻘 때문에 고무장화와 비옷은 필수였다. 
목이마르면 브로콜리를 하나 꺾어서  밑둥을 손질해서 베어먹고 머리부분은 버렸는데 이 맛이 기가 맥혔다. 이때 먹은 브로콜리가 평생 먹은 브로콜리보다 수월히 더 많을 것이다.
 
이곳에선 브리스라는 재미있는 프랑스 친구를 하나 만났는데 일이 조금 힘들면 레볼루션!! 을 외치고 까마귀가 점심밥을 먹어도 레볼루션!!을 외치는 과격 혁명분자 였다. 고향에서 디제잉을 하고 있다며 내 mp3플레이어에 좋은 노래를 왕창 넣어주고 떠났다. 그 중  Doors의 앨범도 있어서 매일같이 들었다. 


다시만난 Backpacking in Style Crew

즐거워 보이는 포츈 
 

말끝마다 혁명을 외치던 브리스. 빨래말리던 중


브로콜리 농장. 일 시작하자마자 저렇게 된다. 아 보고만 있어도 축축해 찝찝해

 
 

호주 양파는 왜 이리 매운지 썰 때마다 통곡을 하게 됨



그러던 어느날 모텔에 한인 컨츄렉터를 통해서 한국 워홀러들이 30여명 정도 한꺼번에 유입되었다. 
재미있는게 이사람들 농장에서 일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농장주가 설렁설렁 일하던 호주인들을 대량으로 해고해 버렸다. 팀을 나누어서 작업했는데 수확량 차이가 엄청났거든.
덕분에 원래 내가 일하던 팀은 와해되고 나도 이쪽 팀으로 투입되었다. 
여기서 규병이라는 힙합전사를 만났다. 첫인상은 구렸지만 동갑내기 였던지라 금방 말을 텃다. 

규병이랑은 탁구치고 얼굴에 수염그리고 달팽이 기르면서 같이 놀았다.
규병이는 매우 알뜰해서 구두쇠인 나와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다시 호주에 오기전 종로에서 잠깐 얼굴 볼 기회가 있었는데 맨날 2XL짜리 힙합 뮤지션 같은 옷만 입고다니더니 어느새 슬림핏 와이셔츠를 입은 여행사 신입사원이 되어있었다. 

 

 

규병의 옷을 빌려입고
 

옷고르는 규병. 규병아 어떤사람이 여행중에 옷을 그렇게나 많이 들고 나니니 네가 패리스 힐튼이니?
 

농장에서 잡아온 달팽이. 이름을 비욘세라 붙이고 잘한번 키워 보려 했으나 어느날 밤 탈출해 버렸다.
 

잡지 읽던 규병이가 뒤집어지고 있길래 가서보니... 이름을 소리내어 읽어 보세요.



핏츠월스에서는 그렇게 2달반 정도 저축하며 살았다. 다음 목적지는 코리아.
귀국을 앞두니 가슴이 두근두근 콧구멍이 벌름벌름.,  도착하면 순회할 식당 리스트를 만들기도 하고. 
들어올때 리턴티켓을 끊어놨기때문에 비행편은 쉽게 구했다. 
공항이 있는 브리스번까지는 데니스가 데려다 주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버거킹쿠폰과 두루말이 휴지를 건내주며 잘가라고 헸다
2008년 1월1일 모두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만나자는 기약을 하고 헤어졌는데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여행 내내 있는 고생 없는고생 다하고 돌아가는데도 왠지 그 경험들은 고생스러웠다기보다 이런 짓을 내 인생에서 언제 또 해볼수 있겠나 싶은 큰 즐거움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아마 젊음의 파워이겠지. 
 
여기까지. 첫번째 호주 기행문 끝.



나리타 공항. 마지막으로 시도한 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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