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요/도서

춘성스님

유 진 정 2016. 8. 15. 19:21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한 춘성스님의 사진이다 정말이지 한성깔하게 생겼다. 

일화들도 영판 미친놈같고 웃겨서 읽다보면 빵빵터짐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승려들은 모두 피난했다. 3일 후 서울 점령 소식을 접했지만, 그는 조선인민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망월사를 떠나지 않고 도량을 지켰다. 6.25가 끝난 뒤에 승려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소수의 승려들과 함께 망월사를 지키고 있었다. 한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자 그는 다시 돌아온 승려들을 향해 “ 개 좆 같은 놈들아 ”라고 일갈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춘성의 발언을 욕설이나 모욕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어색한 분위기는 깨졌다. 일부 신자들과 일각에서 사찰을 버리고 피신한 승려들을 나무라며 탓했으나, 춘성은 어쩔수 없는 일이라며 너그럽게 양해해 주기를 권고했다 한다.



한번은 춘성이 육영수의 생일에 초대되어 특별히 청와대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가 특별히 법문을 청하자, 춘성 스님은 마이크 앞에 아무런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30분이 경과한 뒤 결국 참가자들의 기다림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춘성 스님은 법문을 설파했다. 그 중에 한마디는 

" 오늘은 육 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지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 " 였다. 

그는 이 한마디로 법문을 마치고 일어서더니 휑하니 나가버렸다. 듣고 있던 귀부인과 대중들은 영부인의 생일에 한 이 법문에 놀라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웃으면서 대단하신 분이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어느날 춘성이 절벽에서 나뭇가지를 놓을수 있는 자야 말로 대장부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의 일화를 소개하며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縣崖撤手丈夫兒,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대장부다.)라는 주제로 법문을 설파할 때였다. 그런데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만 생각한 어느 수행자가 법문이 끝난 뒤 나중에 춘성 스님에게 찾아와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춘성이 " 야 이 새끼야,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 "라고 답했다 한다.



춘성이 서울 선학원에 있을 때였다. 설봉이 찾아와 춘성에게 물었다.

“ 어느 학인이 해제를 하고 봉암사의 성철을 배알하니 즉시 몽둥이로 후려쳤다. 학인은 성철이 때리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떠나려고 인사를 하자 또 후려쳤다. 학인은 그냥 매만 맞고 나와서 상주 갑상사에 계시는 금봉 스님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그 후 성철이 남방으로 가다가 갑상사에 들렀다. 금봉이 그 학인의 일을 들어사 만약 내그 그 몽둥이를 맞고 '아야, 아야' 했더라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성철은 아무 대답도 없이 떠나버렸다. 춘성 자네가 그 때 있었더라면 무어라 했겠나? ”

그러자 춘성은 ' 나라면 이 씨브랄놈이라고 하겠다 ' 라고 답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


ㅎㅎㅎㅎㅎ 

근데 일화들도 일화들이지만 사실은 죽음을 앞두고 읊었다는 시가 넘 멋있어서 퍼왔다. 



滿月靑山無寸樹(만월청산무촌수) / 만월 청산에 나무 한그루 없으니


懸崖撤手丈夫兒(현애철수장부아) / 절벽에서 손을 놓으니 대장부로다


八十七年事(팔십칠년사) / 팔십칠년의 인생사가


七顚八倒起(칠전팔도기) /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


橫說與竪說(횡설여수설) / 횡설수설 하고 다녔으니


紅爐一點雪(홍로일점설) / 붉게 달아오른 화로의 한 조각 눈이었구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