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를 당겨서 한 사람을 죽이고 다섯을 살리느냐 VS 다섯을 죽이되 내 손을 피를 묻히지 않느냐,
영원한 웹의 떡밥 트롤리 딜레마다.
상황을 좀 더 불편하게 바꾸어 보자..
다섯 사람이 철길에 묶여있고 트램이 돌진 중이다. 당신이 육교 위에 서 있는 뚱뚱한 남자를 떠민다면
남자가 떨어져 죽지만 그의 거구가 트램을 멈출 수 있다. 뚱남을 떠밀겠는가?
하버드에서 트롤리 딜레마를 연구하는 조슈아 그린 교수 팀의 조사에 따르면 첫번째 질문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레버를 당기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번째 질문에서는 많은 이들이 뚱뚱한 남자를 밀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뚱남을 밀겠다고 답한 두 그룹이 있었다.
경제학자와 (임상적 진단을 받은 바 있는) 사이코패스들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집단 또한 그들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북인도 사원의 승려들이었다. 대부분의 승려들이 뚱남을 밀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동기는 조금 달랐다. 앞이 두 그룹이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결론을 내렸다면 승려들은 의도를 중요시 해야 하며 행위가 철저하게 타자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다섯명 중에 히틀러가 존재할 가능성은 이 실험에서 배제한다 )
불교의 교리는 직접적인 살생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지켜야 하는 오계 중 맨 앞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불살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붓다가 아직 보살로 존재하던 생에 500명의 사람과 함께 배에 탔다.
보살인 그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고 곧 한 남자가 모든 승객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자를 죽여 불살생계를 어긴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보살이 내린 결론은 스스로를 희생해 남자를 처치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게 되었으나 그 의도가 이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곧 인간계에 환생했다고 한다.
( 500명을 다 죽이면 배는 어떻게 조타하려고 그러나 / 그냥 좀 묶어두면 되는거 아닌가 / 지옥과 환생이라는 게 대체 뭔소리냐 등의 의문점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스토리는 스토리고 이 일화의 요점은 불교가 이타적 동기에서의 살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 )
예전에 수승한 사람들 보면 착한 사이코패스같지 않냐는 이야기를 누가 한 적이 있었는데 꽤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인간적 고뇌나 감정적 고통 없이 냉정하게, 그러나 이타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한 듯
이번 보험사 CEO 암살사건을 보면서 이 주제를 떠올렸다.
사건의 긍정적인 면을 조망해보자면 극단적인 이윤추구로 다수의 고통을 조장하는 기업들에게 경종을 울렸다는 것이 있겠다.
그러나 암살범 루이지 맨지오니의 의도가 이타심만을 바탕으로 이루진 것은 아니다.
영웅적인 선언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그것은 그의 격노가 가족의 고통이라는 사적 동기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건의 여파로 보험제도가 개정된다면 폭력의 효율성을 학습한 제2, 제3의 암살범이 등장할 가능성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과 정부가 단시간에 조취를 취할 확률은 희박할 것이다.
또한 그의 행위는 자신을 영웅이라 칭송하는 다수의 시민들에게 폭력과 사적재재의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이 탐욕과 증오의 꼬리물기는 그것을 종결하고자 하는 다수의 의지가 뒷받침 되지 않는 한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스물 여섯의 루이지 맨지오네는 만델라와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을 기득권과 비겁자의 사고라며 비판했지만
한평생 온갖 시위와 전쟁에 참가하며 이꼴저꼴 다 본 만렙 노친네들이 한 목소리로 비폭력을 외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