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봄은 미친 계절

유 진 정 2025. 4. 4. 16:13

저는 봄이 무섭습니다.

겨우내 참아온 수억의 생명들이 땅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시기
광기에 가까운 그 활기 속에 파묻혀 있다보면 문득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생명들은 모두 죽음을 향해 맹렬히 돌진할 예정이니까요.
그런 엄연한 진실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저 기세, 치기어린 태도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조증에 걸린 광인의 표정, 버블말기 일본의 화려함 뒤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과도 같은 것이 이 계절 속에 존재합니다.

공포는 무의식 속에 묻어두고 있을 때 가장 찝찝한 법이죠
예민한 문인들은 봄의 불안한 흥분 속에 죽음을 끄집어내 시상으로 삼곤 했습니다.
세 편의 시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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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T.S. 엘리엇의 황무지 입니다.
너무 유명하고 긴 시이니 중간에 자르도록 하겠습니다. 


황무지
                           - T.S 앨리엇


I.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버거 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이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태공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중략)



어떠신가요? 저는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네요
특히 저 한 줌의 먼지 속 공포라는 대목이 무서워요

쿠마에의 무녀는 아폴론의 신전에 살던 무녀를 말합니다. 무려 천년을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이 무녀가 철딱서니 없던 시절에 아폴론에게 먼지를 한 줌 들고 가 이 만~큼 살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랜 생명만을 요구했지 젊음이라는 키워드를 빼먹은 거에요

신이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일까요 
마치 구버전 챗GPT급 맥락 해석로 우리의 아폴론은 무녀를 "노화하는"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심지어 어느 날 무녀가 아폴론의 고백을 거절하자 왜 안 만나줘빼액 정신을 실천하여 
그녀의 육체를 쪼그랑 할망으로 만들어 버린답니다.

무녀의 육체는 점점 시들어가다 결국 항아리에 보존되는 비참한 지경에 도달합니다. 정신이 멀쩡한 식물인간과도 같은 상태이지요
항아리 속 육체도 다 삭아 없어지자 결국에는 목소리만 남게 됩니다. 

그 모든 고통 속에 무녀는 얼마나 죽고 싶었을까요.
그리고 항아리 속 그녀를 놀리는 아이들, 봄에 사는 존재들은 또 얼마나 잔인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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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승자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삼십 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

봄에는 산천초목이 되살아나고
쓰레기들도 싱싱하게 자라나고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내 입안에서 오물이 자꾸 커 간다.

믿을 수 없이, 기적처럼, 벌써
터널만큼 늘어난 내 목구멍 속으로

쉴 새 없이 덤프 트럭이 들어와
플라스틱과 고철과 때와 땀과 똥을
쿵 하고 부려놓고 가고

내 주여 네 때가 가까웠나이다
이 말도 나는 발음하지 못하고
다만 오물로 가득찬 내 아가리만
찢어질 듯 터져 내릴 듯
허공에 동동 떠 있다



난리났습니다.
이 분 시는 일부러 중간에 끼워넣었습니다. 
처음이나 마지막에 등장하면 너무 우울하니까요

몇년 전 아는 분이 빌려준 최승자 시집을 몇 장 읽고 저는 책을 덮었습니다. 어떡해 시를 이렇게 쓰면 어떻게 살아

빌려준 분께 이 여자 자살했냐 물으니 아직 살아있다길래 용기를 내어 끝까지 읽었고 웹을 뒤져 시인의 사진을 찾아본 뒤 다시 잠깐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그 사진은 차마 못 올리겠고 제법 건강해 보이시는 사진을 포스팅 말미에 첨부합니다.  

참고로 이 분은 가을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셨습니다. 
< 개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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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ght exists in spring 
봄에는 어떤 빛이 존재한다    

                          -에밀리 디킨슨


A light exists in spring
Not present on the year
At any other period—
When March is scarcely here

봄에는 어떤 빛이 존재한다
일년 중 다른 어떤 계절에도 존재하지 않는-
3월이 이제 겨우 왔을 뿐인데


A color stands abroad
On solitary hills
That science cannot overtake,
But human nature feels.

고독한 언덕 위에 색들이 서있다
과학으론 넘볼 수 없지만
인간의 본능으로 느낄 수 있는,


It waits upon the lawn,
It shows the furthest tree
Upon the furthest slope we know;
It almost speaks to me.

잔디 위에서 기다리고
가장 멀리 있는 나무를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먼 비탈에 선
그것은 나에게 말을 거는 듯 하다


Then, as horizons step,
Or noons report away,
Without the formula of sound,
It passes, and we stay—

그리고 지평선이 물러나고 
정오가 안녕을 고할 때
소리같은 것도 없이 그것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머물러야 한다
 

A quality of loss
Affecting our content,
As trade had suddenly encroached
Upon a sacrament.

상실의 속성
우리의 만족감을 뒤흔드는
마치 성찬식에 쳐들어온 
장사꾼과도 같이



에밀리 딕킨슨은 잘 알려진 대로 히키코모리로 살다 가까운 분이 사망하자 실의로 죽어버리신 예민러이십니다. 
명민한 젊은 여성으로써 19세기 청교도 국가의 스피릿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 일까요
디킨슨은 기독교 정신, 특히 구원과 희망에 매우 큰 반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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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장르는 정말 놀랍지 않나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것들을 느껴야 이렇게 심플하게 써 낼 수 있는 걸까요 (황무지 빼고)
간략하기 때문에 강력하고 우리의 마음 속 한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습니다. 

죽음과 상실에 대한 인식은 두렵긴 하지만 어쩐지 싫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무시한 채 영원히 살 것 처럼 구는 오만이야말로 상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그럼으로 이 덧없는 계절이 끝나기 전 포근한 그늘에  앉아 음침한 시 한 편 낭송해 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https://c-straw.com/lounge/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