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개소리에 대하여

유 진 정 2025. 8. 29. 19:19

비트겐슈타인은 언젠가 롱펠로의 시가 자신의 모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더 오래전 예술의 시대에는
건축가들이 최고의 세심함을 기울여 공들여 만들었지
매 순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들이 모든 곳에 계셨으므로.

이 구절의 요점은 분명하다.
옛날에 장인들은 일할 때 쉽게 하려고 요령을 피우지 않았다.  

그들은 세심하게 일했고 일의 모든 측면을 면밀히 살폈다
제품의 모든 부분을 꼼꼼히 검토하였고 각 제품들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대로 설계되고 만들어졌다.

옛 장인들은 자기 작품에서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들에 대해서조차 사려깊은 자기 규율을 느슨히 하지 않았다.  
비록 그 특징들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장인들은 양심 떄문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양탄자 밑에 쓸어 담듯 숨기지 않았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수작bullshit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주의하게 만든 조잡한 물건이 어떤 면에서 개소리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개소리에 대하여 by 해리 G. 프랭크퍼트 p23-25)

 

 

 

일전에 미래의 아랍인이라는 만화책을 추천받아 읽었다.
읽다보니 등줄기가 오싹해지는게 한여름 납량특집이 따로 없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주인공이자 작가 리아드 사투프가
야심찬 아랍인 아버지를 따라 70년대 리비아(카다피식 사회주의를 도입한)로 건너가 보고 겪은 것들에 대한 내용인데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눈으로 보기에 당시의 리비아 시골은 지옥과도 같은 곳이다

읽다가 페이지를 덮은 장면이 두 번 있었는데 한 장면은 주인공의 앞집 가족에 대한 묘사였다.
흐리멍텅한 눈으로 애를 계속 낳는 애엄마와 마당 한 구석에 묶여있는 당나귀

당나귀의 옆구리는 피투성이에 곪아있다.
큰 아들이 항상 거기에 돌을 던지기 때문이다.
돌에 맞을 때 마다 당나귀는 소리를 내지 않고 다만 입을 쩍 벌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 뿐이다.

두번째 장면은 새끼 강아지를 발견한 소년들에 대한 페이지였다.
어머나 귀여운 강아지네, 하고 주인공의 엄마와 주인공은 창밖을 내다보며 미소짓는데
곧 소년들이 강아지로 축구를 시작한다.
그러다 어떤 소년이 밭 가는 쇠스랑을 가져와 소시지에 포크를 찍듯이 강아지의 옆구리를 찍어 들어올렸고
몸이 꿰뚫린 강아지는 이로 쇠스랑을 물어뜯는다.

그걸 본 주인공의 프랑스인 엄마는 거의 착란을 잃으키며 그들을 저지하려 뛰쳐나가지만
아버지는 남자애들이 노는 건데 그럴 거 없다며 엄마를 말린다.
곧 어느 남자가 삽을 들고 달려와 강아지의 목을 쳐서 뎅겅 잘라내고 이벤트는 종료된다. 

외간남자와 정을 통한 주인공의 과부 친척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버지와 오빠에 의해 명예살인을 당하고 
이거는 걍 온 나라가 김복남 살인사건의 무대다. 가축과 아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 = 그 나라의 민도 

사회주의 독재와 광신이 짬뽕된 체제 아래 관제시설과 교육시스템은 개판으로 돌아가고

말 그대로 신이 버린 도시라는 느낌인데
초등학교에서 코란만 달달 외우게 하는 가장 종교적인 곳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게 너무 뻑덮이니까 더 신앙에 매달리게 될 수 밖에 없고.

공산품과 건축물에 대한 묘사도 매우 흥미롭고 기분 나쁜데
가게에서 살 수 있는 신발이 운동화 모양 금형에 플라스틱을 부어 찍어 만든 엉터리이다. 
교복은 비닐로 만들어져있고 가게에서 가장 비싼 책가방은 마분지에 얇은 천을 덧씌워 만든 것이라 비를 맞으니 조각조각 해체되고 만다.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은 현관이고 모든 벽에 금이 쫙쫙 가 있다. 황금을 쌓아두고 사는 고관대작의 집도 마찬가지

이쯤에서 저 위의 롱펠로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이들의 내면에 신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들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맹목적인 교리와 이데올로기를 개소리라고 치부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