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의 업의 고리 (수정)

유 진 정 2022. 5. 8. 07:53





길상사 낮에 갔을때는 구렸는데 밤이 찐이네 등 배치가 아주 귀여움. 입구에서 사랑방 캔디 팔고싶음

길상사는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기생 자야(김영한)가 가슴아픈 이별 뒤
훗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본인 소유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통크게 시주하여 절이 된 장소라고 한다.

예전에 이 말을 듣고 흥미롭길래 좀 파봤는데
격동의 근대사와 인간의 어두움, 개인적 집착이 저 로맨틱한 스토리 뒤에 숨겨져 있었다.

그렇다 팩트가 아니고 스토리인 것..

대중은 팩트보단 스토리에 이끌리기 마련이라 저 이야기만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쥐구멍 애독자들이라면 분명 이면이 궁금해서 드릉거릴게 뻔하기 때문에 내가 알려줌
(이 중에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불확실한 면이 있음. 관련된 사람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일단 본인과 백석이 연인사이였다는 김영한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됨

백석과 3년을 사귀고 함께 살기도 했다는데 본인의 말을 제외하면 증거가 하나도 없음
글쓰는 인간을 만났는데 편지 한 통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만남이 사실이라 쳐도 본인이 주장하는 대로의 깊은 관계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


유명인인 법정스님을 통해 요정을 절로 바꾸고 백석을 연상시키는 명칭인 길상사라고 이름 지은 것도 어떤 종류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행위로 보임
(백석의 일본유학 시절 거주지 주소에 길상사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이것은 훗날 연구가에 의해 잘못 전달된 정보라는 것이 밝혀짐)

참고로 대원각의 실소유주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의혹이 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남조선로동당의 당수이자 매드 코뮤니스트 박헌영까지 등장함 (매드가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정신병을 앓음)

재밌겠지!

그래서 드라마 빼고 사건 위주로 정리를 해봄


- 김영한은 손님으로 온 백석을 만난 적이 있음


- 인기남이었지만 여러차례 결혼생활 실패와 생활고를 겪고 개우울하게 살아가던 시인 백석은 광복 이후 고향 정주로 돌아가 이후 쭉 북한에 정착

- 남로당 당수 박헌영에게는 아들이 있었고 부친 월북 후 화엄사에 맡겨져 훗날 원경이라는 스님이 됨 (작년 입적하심)

- 미모의 기생간첩으로 유명한 김소산은 박헌영의 조카이자 자금책.
김소산이 운영하던 대원각은 남로당이 고위관료들로부터 정보를 취득하는 아지트이자 비자금 세탁소였음 (원경스님 증언)

- 1948년 미군정의 수배를 받던 박헌영 월북. 월북 남로당계의 우상으로 등극

- 1949년 김소산의 간첩활동이 발각되고 체포되자 김소산은 김영한에게 대원각의 관리를 맡김

- 박헌영은 남로당계의 아이돌이었지만 북한내에서의 기반은 약했고 김일성과도 대립

- 코너에 몰린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조선인민군을 남한으로 내려보내면 우리 남로당원 <20만 명>이 이에 봉기를 주도, 적화통일 쌉가능” 이라는 주장을 펼침
이념에 매몰된 한 인간의 망상이었을 수도, 살고자 승부수를 띄운 것일 수도 있음
(그의 이전/이후 행보로 보아 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함 정신병을 앓기도 했고 책략가보다는 불도저 타잎 같음)

김일성은 박헌영의 허언을 백프로 믿진 않았지만 중공과 소련을 믿고 일단 ㄱㄱ하기로 함

- 1950년 6월 25일 북의 남침

- 북한 발림

- 빡돈 김일성 볼셰비키 혁명 기념식에서 박헌영에서 쌔꺄 20만명 어떻게 된거야 스탈린한테는 누가 말할건데 시전

- 박헌영 니가 말해 수상이자너 시전

- 두 쌍남자 남 잔치집에서 다이다이 뜸 소련 대사 절레절레

- meanwhile 남한. 김영한이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이재학의 애첩이 됨

- 1955년 박헌영과 북한 내 남로당원들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싹쓸이 당함

박헌영은 "그래 내가 미제간첩이라고 치고 독박 쓸 테니까 죄 없는 당원들은 살려달라" 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음.
처형 전 유언으로 " 처자식 외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수상에게 꼭 지켜달라고 전해주시오 " 라고 했다는데 김일성은 쌩깠다고.. 처자식의 생사는 불명

- meanwhile 남한. 대원각의 소유주가 김영한으로 스리슬쩍 바뀜

- 백석은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다 반체제 발언으로 집필금지를 당한 뒤 압록강 유역에서 노동자로 살게됨. 이후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최근 1996년까지 살다 사망했다는 연구결과가 밝혀짐. 문단에는 복귀하지 못했다고

- 김영한은 원경스님에게 대원각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당시 잘나가던 무소유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는 통수를 침 (원경스님 주장)

- 길상사 탄생

- 김영한 <내 사랑 백석: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짧고도 영원한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책 출판

나는 여기에서 이거 뻥이구나라고 80% 확신함. 글이 되게 자기 이야기가 아닌 제3자의 상황을 묘사하는 느낌이고 자기애적임.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음

<꽉 잡힌 내 손목에는 이미 불꽃 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이 되었다. >

문장에 형용사와 부사를 한도까지 꽉꽉 채워넣는 것은 없는 것을 꾸며내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버릇인데
별로 아름답지 못한 진실을 필사적으로 미화시키고야 말겠다는, 한 여인의 집념이 팍팍 느껴지는 한 서린 문장들이었음

- 김영한은 카이스트에도 122억원을 기부하였는데, 딸은 이에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을 걸어 44억을 돌려받음


정리를 하고 나니 업의 고리라는 표현이 떠오름

김영한의 발자취에서는 어떤 종류의 슬픔을 느낌. 여자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는 뭔가를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는구나 하는 생각도 듬

등장인물 모두가 각자 원하는 대로 산 것 같으면서도 또 전혀 그러지 못했던 거 같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어떤 한 점을 향해 가게 되어버리는 삶의 이상함이랄까.. 김일성은 행복했을까?

그리고 길상사 땅은 결국 절이 될 운명을 타고 난 자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듬. 묻을 게 너무 많음

아무튼 초파일 하루 전인 오늘 근처에 들른 김에 길상사를 방문했고,
동행한 젊은이에게 배경을 설명하려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아 그냥 백석이랑 만나던 기생이 시주를 해 요정이 절이 되었습니다 까지만 전달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간만에 백석의 시를 읽음. 아름다운 글이니 여러분도 읽어보시길

 

 

 

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