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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시인 김수영의 일생

유 진 정 2023. 3. 14. 23:47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侮辱(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圓周(원주)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遊星(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億萬無慮(억만무려)의 모욕인 까닭에.
 
 

 


초봄의 뜰안에


초봄의 뜰안에 들어오면
서편으로 난 난간문 밖의 풍경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황폐한 강변을
영혼보다도 더 새로운 해빙의 파편이
저 멀리
흐른다

보석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냄새가 술취한
내 이마에 신약처럼 생긋하다

흐린 하늘에 이는 바람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데
옷을 벗어놓은 나의 정신은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은
고독은 신의 無才操와 詐欺라고
하여도 좋았다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 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1960년 9월 20일 김수영의 일기
 
 
 

 


 
 
김수영 연보 (연월은 귀찮음으로 생략)
 
지주 부모 슬하에서 그럭저럭 유복하게 성장. 소년기엔 오스카 와일드를 좋아함

기울어져 가는 가문의 기대를 업고 도쿄상대 입학 그러나 학업에 흥미를 잃고 연극에 빠져삼 

징집 피해 가족과 만주로 이주. 귀국 후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몰두

귀국 직후에는 거지꼴이었다고 함
훗날 부인이 되는 김현경을 만나(이쪽은 집이 잘 살았다고) 오뎅국을 얻어먹고 지갑을 통째로 적선받음
여대생 김현경과는 현경의 아저씨 뻘인 이종구를 통해 알게 된 사이

이후로도 뭔가 김수영이 처참한 상태일 때마다(like 결핵성 치질이 도져 사경을 헤맬 때라던지)마다 김현경의 도움을 받음
김수영은 김현경의 작문선생님이 되어줌

이에 김현경 부친, 불알 두 쪽밖에 없는 시인 나부랑이한테 딸은 못준다며 김현경 방문에 대못 박아버림

김현경 어느날 겨우 허락받아 외출했다가 김수영 딱 만남

김수영, 나 영어선생으로 취직했다 수업 80분인데 40분만 하고 나올테니 딱 기다려. 하고 김현영을 세워둠 
밖으로 나온 김수영 My soul is dark!!!! 라고 외치며 청혼

아빠한텐 비밀로 동거 ㄱ


6.25 발발 김수영 길바닥에서 서울점령 북한군에 의해 붙잡혀 강제 징집됨
죽을고비 넘겨가며 탈주

그러나 이번엔 남한 경찰에 의해 의자로 쳐쳐쳐맞고 빨갱이로 몰려 포로수용소에 갇힘

혼돈의 카오스였던 거제수용소에서 지옥의 시간 보냄
멘붕 와서 자기손으로 생니를 막 뽑았다고.. 
이빨이 없어져버린 김수영에게 미군 병원장이 틀니를 해서 넣어줌.

3년이 지나 김수영 틀니와 함께 석방됨
당시 틀니는 엄청나게 귀한 물자였기 때문에 술마실 때마다 틀니부터 뺀 뒤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어 보관했다고 함.

부산에서 통번역 일 등으로 겨우겨우 생계유지

우리 애낳지 말고 글만 쓰자~ 라고 부인 김현경에게 딩크를 선언했지만 선언이 무색하게도 두 아들 탄생
(정보를 찾다보니 김현경도 김수영도 철저한 피임 이런 거랑 별로 안어울리는 사람들 같아서 당연한 결과인듯)

암튼 수용소 생활 이후로는 김수영은 맛이 좀 가 있었다고 함
이때 부부의 주거환경 역시 극악이었는데 견디다 못한 김현영이 아저씨뻘 이종구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러 갔다가 
뭐가 어떻게 된건지 이번엔 둘이 살림을 차리게 됨

어느날 김수영 이종구네 집에 찾아옴
셋이 어색하게 밥상머리 앞에 앉아만 있다가 김수영이 <같이 가자> 한 마디 함
이에 김현경 <먼저 가 계세요> 라고 대꾸 
(그 후 2년간 더 이종구의 집에서 거주 그 동안 나온 시가 위의 <너를 잃고>) 

2년이 지나 김수영을 다시 만나러 간 자리에는 이발도 하고 한결 사람같아진 모습의 멀끔한 김수영이 앉아있었고 
나 취직했다 라는 말로 다시 한번 프로포즈 -> 재결합 

이후 마포로 이주한 부부는 김현경이 데려온 병아리 열한마리로 양계를 시작함.
이때가 둘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위의 <초봄의 뜰 안에서> 참조)

김수영은 양계를 좋아했다고 함.  
“되잖은 원고벌이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하고, 난생 처음으로 직업을 가진 것 같은 자홀감(自惚感)을” 느꼈다. " 라는 발언 (직장은 역시 그만 뒀던 모양)

둘의 사이는 괜찮았지만 김수영은 일년에 두세차례 술에 취하면 김현경을 이유없이 두들겨 패기도 하는 등 한남충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고 함
(위의 <죄와벌> 참고. 부부가 영화보러 갔다가 다보고 나와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시라고 하고 
나중에 김현경 여사 인터뷰 보니까 그 영화 내용 땜에 그랬던 거 같다길래 개인적인 추억이 떠올랐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이해하는 예술충 부부였기 때문에 나름 잘 해로했던거 같음

김현경은 안목을 살려 의상실 등을 운영하고 김수영은 창작을 계속 해나감 4.19 혁명 이후부터는 현실을 직시하는 강렬한 글들을 선보임

그러던 나날 중 문인들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취한 채 귀가하던 김수영 버스에 치여 사망 

여기까지 찾아보고 오늘 방문한 김수영 문학관에 적혀있던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롯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던 김수영의 발언이 떠올라서 기분이 묘했음. 본인에게는 나름 마음에 드는 최후였을지도

아무튼 그 후 김현경에 의해 그의 시 활동이 널리 알려지고 문학관까지 건설되었다고 함

시가 멋지길래 작가의 삶도 한번 들춰봤음. 그리고 김수영 양조위 닮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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