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IMF서울
쌍문동의 한 아파트에서 열린 황웅태 작가의 SID전이다.
- SID는 “Support Induced Discoloration”의 약어로 회화에 있어 지지체 속 불순물이 물감을 변색시키는 현상, 의학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돌연사” 등을 의미한다 -
고 하는데
사실 전시 타이틀 뜻 보다 공간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음
인스타 설명에 따르면
< 쌍문동 어딘가, 26년 동안 방치된 곳에 열린 일시적인 포탈.예약제로 운영되며, 예약시 주소를 안내해드립니다. 대관 문의는 DM으로 부탁드립니다. >
< IMF Seoul은 26년의 세월 동안 방치된 아파트입니다. 이 정도로 용도를 잃고 방치된 공간이란, 누군가에겐 돌아볼 마음조차 들지 않는 무엇임을 의미하는데요. 이곳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전시 공간으로서의 불충분한 쓰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불충분함. 이는 전시에 있어 환경적 제약이 따른다는 의미로, 이웃의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높은 데시벨 등이 이에 포함됩니다. >
단지로 진입하는 길은 단정했다.
저 킹받는 연두색 메쉬펜스만 빼고
저거 어딜가도 보이고 볼때마다 미칠 거 같음
대체 뭔 생각으로 형광연두색인거냐고
이렇게 된 이상 합리적 이유라도 존재했으면 좋겠는데 (e.g. 자동차가 들이받는 사고 방지를 위해 눈에 띄게 만들었다 등)
지금 여기까지 쓰고 이유를 찾아냄
역시 싸서 많이 쓰이는 것이었음
그건 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하필 연두색으로 골라 박는 이유가
쓰이는 곳이 주로 화단이라 식물과 잘 어우러지라고^^
이 지점에서 가끔 공포를 느낀다.
중국의 페인트 녹화사업 같은..
미감과 윤리가 마비된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공포를 느낀다고
무언가를 지나치게 빨리 이루려고 하는 태도는 언제나 대가를 치루기 마련인데
이 IMF서울 공간이 26년간 비어있게 된 이유 역시 아마 그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름부터 IMF잖아
그러나 시간의 힘은 부드럽고도 강력해서
졸부적 판타지가 투영된 공간도 이제는 신선해졌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아름다웠을 것이다.
나는 90년대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버블 붕괴 직전 일본처럼 낭만과 패기가 넘치는 당시의 정서를 기억하고 있는데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치는 아치형 실내 창문에서 그 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문이 다 아치임
이거 문 바꿀 생각을 첨부터 아예 안 해야 가능한 담대한 시공이 아닌가?
요즘 아파트 단지 이렇게 짓겠다고 하면 정신 나갔냐는 소리 들을 듯
대리석을 흉내낸 반짝거리는 바닥재
어릴때 살던 주공아파트 바닥도 이런 거였는데 꽤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쭉 가다가 갑자기 어느날 가난하고 비참해보이는 나무 무늬 장판이 등장했고 걸레받이 안 해놓으면 비참함이 증가함
이 집은 안방의 벽지가 특히 호사스러움
같은 꽃 벽지 (꽃이니까 이쁘겠지 희희 -> 연두색 펜스랑 똑같은 사고) 라도 90년대의 풍요와 조화가 느껴져 크게 거슬리진 않음
베란다에는 화분이 키 순으로 놓여있었는데
소철 저거 왜 살아있지 무섭게...... 26년간 화분에 방치해둬도 사는 식물이라니
아무튼 여기까지 보고 나에게 공간을 소개해준 고안철에게
'근데 여기 진짜로 왜 비어있는 걸까?'
라는 질문을 뒤늦게 던졌더니 고안철이 갑자기 눈 이상하게 뜨면서
' 사고매물..이라던지? '
라길래 오싹해짐
아니 말이 되는게 일단 장소이름이 IMF서울이고
상태도 꽤 좋은 서울 아파트가 26년 동안 비어있는데는 분명 명확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고
인스타 공간 설명도 뭔갈 암시하는 거 같잖아?
이 질문은 그냥 묻어두기로
아무튼 조각과 작품들의 배치가 매우 적절하고 재밌다고 생각했음 (위 여섯번째 작품명은 운동회)
베란다는 특히 빛과 공간 조형물 전체가 하나의 작품같이 느껴짐
닫혀있는 문과 찬장들은 모두 열어 볼 수 있었고
그 안에 들어있던 추억의 소품들
무선 전화기의 재다이얼/포즈 버튼과 훼미리 쥬스 상자에서 잠시 아득해졌다.
그리고 저 골프공 옷걸이
전 날 옆 건물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걸 보고 기묘한 형태에 홀려서 주워갈까 하다
발이 너무 못생겨서 말았던 거고 (놀랍게도 축구공 모양)
너무 이상하게 생겨서 인터넷에 골프공 옷걸이라고 검색했더니 그걸 59000원에 아직도!
판매 중인 사이트 나와서 충격을 받았었는데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틀 연속 눈에 들어 온 거 보면 뭔 홈쇼핑 히트 상품 같은 건가?
우리가 쓰는 물건들은 몇 년 뒤까지 발견되게 될까?
유일한 새 물건 조명과 화려한 천장등 장식
공간을 더 잘 느끼기 위해 5분간 눈을 감고 앉아있었는데
우리의 소리를 지우니 다양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일요일 아파트 단지의 일상 소음이 매력적이었다.
윗 집에 쿵쿵 뛰어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랫 집이 빈집이라 자유롭겠구나 저것도 복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 방문자를 위해 이제 공간을 비워줘야지
' 사랑의 메모를 남기세요 '
방명록을 적고..
나가는 순간까지 발목을 붙드는 재미들
컴퓨터 AS 자석에 최신형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것이 묘했다
고속으로 전개되는 테크노월드 가끔 나도 따라가기 벅차다고 느낌
호수판 먼지 안 닦은 거 좋았음
예전에는 다 저런 우유구멍이 있었지
엄마가 외출한 날 열쇠 없이 학교에서 돌아와 문 앞에 앉아있다가 강아지가 낑낑대길래 저 구멍으로 꺼내서 안고 있던 기억이 있다.
엄마 언제 오려나 하는 걱정을 강아지의 따듯함이 덜어주었고
누군가 지금의 우릴 보면 되게 불쌍하고 귀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라는 자의식을 자각하며
잔잔한 자기혐오를 느낀 순간이었다.
이 자기혐오의 굴레에서 벗어나는데 까지 정말 오래 걸렸는데
아무튼 별 생각이 다나네
약간의 공포와 노스텔직을 한껏 느끼며 퇴장
전시 제목: SID 일시: 2024. 4월 1일(월) - 4월 28일(일)/8일(월), 22일(월) 휴무 예약제로 운영
문의
https://www.instagram.com/imf_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