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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스터

유 진 정 2013. 9. 4. 16:50

"새로운 뉴스를 듣는다는 것, 그건 담배한 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아. 피우고 나선 던져버리지"


"바로 그 점을 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지만 자네는 골초가 아닌가! 어째서 뉴스가 담배 같다는게 불만이지?"

폴이 웃으며 말했다. 

"담배야 건강에 해롭지만 뉴스는 위험하지 않은 뿐더러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기분전환을 해 주지"


"이란과 이라크 간의 전쟁이 기분전환 거리란 말인가?"

그리즐리가 물었다. 폴을 동정하는 그의 마음에 약간의 신경질이 섞였다. 

"오늘날의 철도사고들, 이 모든 살육을 자네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나?"


"자네도 남들처럼 죽음을 비극으로 보는 잘못을 범하는군" 건강상태가 아주 좋아보이는 폴이 말했다. 


" 물론 난 죽음을 언제나 비극으로 봐 "그리즐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게 잘못이야, 철도 사고는 그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나 자식을 거기 태워 보낸 사람에겐 끔찍한 일이겠지, 그러나 라디오 뉴스에서의 죽음은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과도 같아. 살인을 오락으로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마술사라 할 수 있겠지. 그것도 한 건이 아니라 수십 건, 수백건의 살인과 연쇄 살인이야. 자신의 추리소설이라는 학살캠프에서 우리가 좀 더 큰 기쁨을 만끽하도록 말이야. 

아우슈비츠는 잊혔지만 에거사의  소설에 나오는 화장터 화로는 영원히 연기를 하늘로 날려보내네, 세상물정을 아주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것이 비극의 연기라고 주장하지는 않을걸."


중략


더욱더 쌀쌀맞은 어조로 그리즐리가 대답했다.

"나도 애거사 크리스티라면 읽네! 피곤할 때나 잠시 어린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을 때 말이야. 그렇지만 삶이 송두리째 어린아이의 놀이가 되어 버린다면, 세상은 알랑대는 미소와 재잘거림 아래 끝장나고 말거야."


폴이 말했다.

"나로선 쇼팽의 장송행진곡보다는 그런 제잘거림을 들으며 끝장나는 게 나아. 한마디 덧붙여 볼까? 악이라는 건 바로 죽음을 예찬하는 그 음울한 행진에서 나온다네. 음울한 행진이 적다면 아마 죽는 사람도 적을거야. 내말을 잘 이해하게.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경외심은 유치한 재잘거임의 그 철없음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거란 얘기야. 비극의 영원한 조건이 뭔가? 인간의 삶보다 가치가 월등히 높은 이상이 존재한다는 거지. 전쟁의 조건은 또 뭔가? 마찬가지야. 자네 삶보다 우월한 뭔가가 있기에, 자네에게 죽음을 요구하는 거지. 전쟁은 비극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어. 유사 이래로 인간은 비극의 세계만 알았고 거기에서 헤어나질 못했네. 비극의 시대는 경박의 혁명에 의ㅐ서만 막을 내릴 수 있어. 사람들은 이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서, 벨라 향수 광고를 반주하는 기쁨의 찬가 네 소절밖에는 알지 못하지. 나로선 이것이 조금도 분개해야할 일이 아니야. 비극은 이 세상에서 추방될 거야. 가슴에 손을 얹고 쉰 목소리로 떠들어 대는 늙은 뜨내기 배우처럼 말이야. 경박은 근본적인 다이어트 요법이라네. 사물들은 자신들의 의미를 90퍼센트 상실하고 가벼워질 거야. 

의미가 그렇게 희박해 지면 광신이 사라지지. 전쟁이 불가능 해져."


"마침내 자네가 전쟁을 없엘  방법을 찾아낸 걸 보니 기쁘군." 그리즐리가 말했다.


" 프랑스의 젊은 세대가 조국을 위해 싸우려 할 것 같은가?

이제 유럽에서는 전쟁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야. 정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류학 차원에서 말이야.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전쟁을 할 능력이 없어. " 


중략


" 위대한 문화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유럽의 병적 태도가 낳은 딸이라네. 무슨 말이야 하면, 언제나 앞을 향해서만 뛰어가면서, 세대의 연속을 마치 각각의 선수가 앞 주자를 앞지르고 다시 뒤 주자에게 추월당하는, 그런 릴레이 경주로 여기는 광기 말이야.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이 릴레이 경주가 없다면 유럽예술도 없을 것이요, 유럽 예술의 특징. 즉 독창성이나 변화에 대한 욕구도 없을 거야.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베토벤, 스탈린, 피카소 등은 모두 릴레이 선수들이요, 모두 같은 경기장에서 뛰고있어. "


"정말 자네는 베토벤과 스탈린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이지. 자네에겐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말이야. 전쟁과 문화는 유럽의 두 축이라네. 유럽의 하늘과 지옥이요, 그 영광이며 수치요, 그럼에도 이 둘을 떼어놓을 수는 없어. 유럽을 어느 하나로만 만들려고 하면, 둘 다 사라지고 말아.

오십년전부터 유럽에 전쟁이 없다는 사실은 오십 년 전부터 우리가 어떤 피카소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불가사의한 관계를 맺고 있어. "


"폴, 자네에게 하나 일러줄 것이 있네."

하고 왠지 불안하게 느릿느릿, 마치 내려치기 위해 육중한 앞발을 들러올리듯이 그리즐리가 말을 꺼냈다.



"만약 위대한 문화가 끝장났다면 자네 역시 끝장난 거야. 자네의 그 역설적인 생각들과 함께 말이야. 그런 역설은 위대한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린아이의 재잘거림에서 나오는 게 아니니까. 자네는 과거 나치나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든 젊은이들을 연상시켜. 악에 대한 욕구나 출세욕 때문이 아니라, 지나친 총명함 때문에 말이야. 사실 비사유를 합리화하려는 논증보다 더 사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도 없지. 난 그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더랬어. 

전쟁 후,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소 떼처럼 공산당에 몰려들었을 때 말이야. 그러자 당은 기쁘게 그들을 일괄 숙청해 버렸지. 자네가 바로 그런 짓을 하고 있어. 자넨 자네 무덤을 파는 자들의 총명한 동맹자라네. "







- 밀란 쿤데라 '불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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