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없는 원숭이의 행복론 - 데즈먼드 모리스

리뷰예요/도서 2013. 8. 2. 04:31

내가 책에서 추구하는것은 오직 한가지! 재미이다 

서점가를 제패하다시피한 자기계발서의 행렬을 볼때면 분노마저 느껴짐 

고등학교때 만나던 남자애한테 카네기인간관계론을 선물로 받았을때도 분노를 느꼈지 


데즈먼드 모리스의 저서는 나의 유쾌한 동물이야기 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큰 기대없이 펼쳐 보았다가 곧 방바닥을 띠굴띠굴 구르게 되었다. 이 아저씨 글을 너무 웃기게 잘씀. 

털없는 원숭이의 행복론은 제목이 비록 자기계발서처럼 들린다고 하여도 모리스의 책이니 구릴리 없다 하고 도서관책장에서 뽑아들었는데 역시나



-  나를 불행하게 하는 확실한 한가지 방법은 내 삶이 더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해서 나에게 설교를 하는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에서 이 책이 당신에게 판에 박힌 행복 증진 연습을 강요하거나 행복코칭 코스에 참여시키려는 식의

"자기 계발 책자" 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다양한 행복의 원천에 관해서 설명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행복해지려면 어떤 식으로 행해야 한다고 설교하기보다는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행복 눈금의 수치를 증가시키고 싶은 사람들에게, 최선의 답은 행복에 이르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행복의 원천을 다시금 조사하는 것이다  -



를 시작으로 모리스 아저씨는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매커니즘에 대해 진화론을 바탕으로 서술하는데

잘 읽히고 재미도 있다. 이 아저씨가 얼매나 엄숙주의자 금욕주의자들을 맘에 안들어 하는지도 엿볼수 있음.

살짝만 읽어 보시길



고통의 행복 

마조히스트


....그보다 약한 수준으로는 청교도와 요조숙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정신적 피학증이 있다. 이들에게는 행복이 자기 부정의 형태로 온다. 이들은 모든형태의 탐닉을 역겹고 사악한 것으로 보는 정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가령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느꼈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해서는 이를 피해야 한다.

섹스나 축제와 같은 주요한 쾌락은 엄격히 금지된다.

알코홀은 사람들을 너무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반드시 금해야 한다. 


이것은 반쾌락 주의자들의 피학적 행복이다. 보다 검소하고 절제된 금욕적인 삶을 살수록 행복은 더 커진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다른사람들은 즐거운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즐겁지 못하다면, 어떻게든 즐거울 수 없는 상태를 매력적인 유혹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 쾌락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이러한 거부 행위를 정신적인 우월함의 한 형태로 즐기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쾌락을 부정할 때마다 자기만족적인 순결한 행복의 고통이 따른다. 일단 이러한 과정이 시작되면 쉽게 자신에 대한 채찍질과 자기 강제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고, 정신적 피학주의자들의 생활은 인간 존재를 희화한 모습인 왜소하고 황량한 상태로 격하된다.

이들 청교도적 광신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행동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고 불운이지만 보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반쾌락주자들의 극단적인 절제가 항상 자신들의 행동에만 국한되는것은 아니다. 

종국에는 다른모든 사람들에게도 이를 강요하려고 시도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는 사회 전체에 유해한 간섭이 되고만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멘켄은 이런현상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했다.

"청교도의 근저에는 유일한 정직한 충동이 있으며, 그것은 행복에 대해서 우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벌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


청교도가 온 나라를 장악하기 시작하면, 곧 금지된 행동들을 규정하는 압제가 점점 심해진다. 

인간의 쾌락은 타락하고 방탕하며 사치스러운 낭비로 그려진다. 무절제하고 추잡한 취미를 숨겼다고 비난받는 것이 두려운 공인들과 사회 지도층은 자신들 주위를 뒤덮는 청교도 봉기물결에 지지를 보낼(마음속으로는 마지못해서) 필요성을 느낀다. 오래 전에 이미 전체 문화가 감염되었고 반쾌락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의 특수한 형태의 피학적 행복이 사회를 장악한 것이다.

최근에 발생한 이러한 움직임의 전형적인 예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으로, 이들은 일상적인 행복의 평범한 원천들인 음악 청취, 텔레비전 시청, 춤, 영화관람 같은 것까지 금지했다.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데서 충족감을 느끼는 면이 피상적으로 볼때 가학증과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들이 금지를 강요하는 가장 주요한 동기는 타인을 다치게 하는 데서 쾌락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향유하게  된 것과 같은 수준의 피학적 행복으로 타인을 물들이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자기 부정의 기쁨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중략)



....... 마지막으로, 고통의 행복 중에서 오늘날 안타깝게도 무시할 수 없는 극단적인 형태의 하나가 테러리스트의 자살 행복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부과하는 고통의 궁극적인 형태로, 종교적 광신자들은 적대국의 구성원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려고 자폭해서 스스로의 몸을 산산조각 낸다.


이러한 행복은 지복의 상태에서 수행된다. 버튼를 누르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이 밀려오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죽는 것이 신성한 순교의 길로 내세에 영원한 행복이 있는 천국으로 가는 확실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세라는 종교적 개념은 많은 것을 보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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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avezha 2013.08.02 08:47 Modify/Delete Reply

    진짜 확 와닿는 내용이네요. 뜬금없지만, 할머니와의 만화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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