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사이드

유 진 정 2017. 1. 13. 01:07

열세살때 읽은 하루키는 야해서 좋았고 스무살때 읽은 하루키는 내용이 없어서 짜증이 벅 났다.

전에 마구잡이로 받아놓은 이북중에 풀사이드라는 단편이 있길래 버스를 기다리며 읽어보았다. 방콕에 도착한 이후로 무거운 글을 못 읽겠다.
리얼리티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더러운 흰색 난닝구를 입은 근육질 남자의 불끈 쥔 주먹, 그 주먹 위에 리얼리티라는 문신이 있는 이미지 같은것만 떠오르는것이다.

예전에 함께살던 미대생과 구남친의 누나는 하루키에 열광했다.
하루키의 글이 그들과 같은 제 1세계 젊은이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과 소설속 인물들사이 관통하는 정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 소설 속 인물들에겐 아둥바둥함이라는것이 없다.
요 앞에 리어카에서 망고파는 아저씨에게 노르웨이숲을 권유한다면 한 세페이지 읽고 얘 뭐래는거냐 하면서 집어던질수도 있음

아무튼 부에서 파생되는 권태에는 분명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풀사이드는 제목부터 돈냄새가 나고 가뿐한게 맘에 들었다. 하루키 글 답게 막힘없이 읽힌다.

35살 생일을 맞은 남자가 자신의 알몸을 들여다 본뒤 노화를 깨닫고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부유한 부모밑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고 큰 일탈또한 없는 삶이였다.
이혼한 아버지가 빌려준 맨션에서 수영을 열심히 하고 여자도 가끔 데려오고 하다가 대학을 졸업한뒤 취직한 교제회사에서 대박을 터뜨려 사회적 지위와 부를 축적한뒤 매력적인 부인과 결혼, 몇년 후 클래식 공연에서 만난 젊은 애인과의 선을 넘지 않는 교제, 수영, 외제차, 와인, 스포츠 클럽, 초록색 캐시미어 스웨터 등등
그리고 집에서 혼자 클래식 레코드를 감상하던 남자는 꺼이꺼이 울어버린다.


화자인 소설가(하루키)를 스포츠클럽 풀사이드에서 만난 남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하며 이것을 소설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하루키는 아니 그러면 댁의 불륜사실이 들통날텐데 괜찮으시겠냐고 묻고, 남자는 그정도는 각오하고 있고 누군가를 상처주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것은 정말 싫고 신물이 난다며 있는 그대로를 적어달라고 재차 부탁한다. 그리고 소설 끝

씨빠 또 낚였네 하는 느낌으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의외로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기억이 난다.
사실 상당히 영리한 전략이 아닌가? 허구인지 진짜인지 하루키가 스포츠 클럽에 다니는지 안다니는지 독자로써는 알길이 없다. 궁금해지는것이다.

그리고 아까 샤워하면서 든 생각인데 역시 소설 속 남자는 하루키 자신이 아닌가
소설적 장치를 제거하고 남는 감정을 느끼는 주체말이다. 거짓의 힘을 빌어 거짓말이 신물이 난다는 자기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