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 온도가 37도에 육박하기 시작했고 윗층 할머니가 구급차에 실려갔다.
수도 요금은 이제 올백으로 머리를 넘긴 할머니의 친구가 받으러 온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나도 할머니꼴이 날것 같아 엄마네 집으로 피서를 가기로 결정했다. 남방 한 벌과 타블렛을 챙겨 막차에 올랐다.
무인선인 신분당선의 맨 앞칸은 전면부가 유리로 되어있어 풍경이 볼만하지만 그것도 두 번보니 시들하다. 오른편의 짐칸같은 공간에 타블렛을 올려놓고 일전에 받아둔 짐자무쉬 영화를 서서 보는데 곧 옆에 서 있던 회사원이 인사불성으로 취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철이 흔들릴때마다 그는 내쪽으로 휘청 몸을 꺾었는데 그럴때마다 영화를 훔쳐보았다. 그가 평형을 완전히 잃고 내쪽으로 쓰러지게 되면 어깨를 붙든 다음 정신 차리세요 아저씨 라고 말해줘야지 생각하는데 다행히 비틀비틀 걸어 자리를 옮기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통화의 상대는 여자였고 둘은 소개팅으로 만난듯 했다.
oo씨 처음 봤을때 목소리 듣고 깜짝놀랐어요.. / 아.. 왜요? / 너무 어리드라고.. 목소리가.. / 깔깔
뻔한 대화였지만 취한 남자의 목소리는 유혹적이였고 여자는 이 불시의 습격을 일종의 로맨스로 여기는 듯 했다.
그들의 통화내용을 훔쳐 듣다보니 그간 맨정신으로 상대해준 주정뱅이들의 목소리가 하나씩 떠올랐다. 물론 하고 싶지 않았다면 안해주었을테니 그들을 탓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밤중에 걸려오는 전화는 언제부턴가 받지 않게되었다.
그가 내리던 역에서 다른 사람들도 많이 내렸기 때문에 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영화를 이어 보는데 이번엔 옆에 앉은 아가씨가 하이톤 보이스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거 있잖아 오빠.. 한 십만원 쥐어주면 끝나는관계.. 어? 알어?? 아 진짜..? 노래방..?? 아 완전 웃겨.. 하하하 나는 기억도 안나는데... 내가 그랬다고? 아 완전웃겨..
잔잔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분홍색 원피스는 싸구려로 보였고 흰색 샌들 역시 낡은 것이였는데 두 새끼발가락이 주장이라도 하듯 양쪽으로 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핸드백이 활짝 열려있었기 때문에 아세톤 한병과 말보로 멘솔, 생리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쯤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로 결정했는데 사정없이 번져 있는 빨간 립스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커같은 입술로 아가씨는 연신 완전 웃겨를 외쳐대고 있었다.
아가씨는 나와 같은 곳에서 내렸고 곧 피와 소변으로 얼룩진 치마의 뒷태가 눈에 들어왔기때문에 나는 눈을 잠깐 감았다. 개찰구에 도착한 그녀는 벨을 누른 뒤 차분한 목소리로 승무원에게 비상게이트를 열어달라고 부탁했고 곧 어둠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