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벅과 호황

유 진 정 2019. 7. 5. 19:43

요즘 읽고 있는 -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 - 를 챙겨 종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재미있는 책이다. 국제 정세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술술 읽을 수 있다.
트럼프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영화 명대사 모음집 저리가라 수준

내가 탄 다음 정거장에서 육십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할저씨가 승차했는데 기사가 타기전에 뭐라고 질문을 했고 할저씨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질문은 수차례 반복되었다

겨우 문답을 끝낸 할저씨는 내 쪽으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에 이 아저씨 나한테 몬가 말이 하고 싶구나 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말을 걸기 시작함

할저씨는 눈빛이 흐리고 건강이 조금 안좋아 보이긴 했지만 말쑥한 차림새(머스터드 색상 바지 + 프린트가 화려한 여름 남방)였고 말을 조근조근 존댓말로 했다

노인이 되니 말귀를 잘 못알아 들어서 젊은이들에게 불편만 준다, 병원에서 맨날 노인 상대하는 간호사들은 정말 힘들것 같다 그런 얘기를 하시길래 뭐 말귀 쫌 못알아 듣는거보다 엄한걸로 행패부리는 환자랑 가족들이 더 싫지 않을까요.. 라는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보았다

이 대화를 물꼬로 할저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오늘 이십년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나보고 이 유튜브 채널들을 꼭 보라고 하더라,
라며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거기에 끼워놓은 메모지까지 보여줌


김동길 TV

가로세로 연구소

TV 홍카콜라

조갑제 TV

뉴스데일리베스트

(중략)


목록을 읽어본 뒤 친구분께서 정치색이 확실하시네요. 라고 말하자 할저씨는


' 만나는 내내 애국우파 표줘야 된다는 이야기만 하는데.. 내가 뭐 말을 꺼내봤자 싸움밖에 안되니까 그냥 듣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친구가 좀 젊은 여자 한명을 데려왔는데 그 여자는 뭐 더 하더라고 '

라고 대답했고 그제서야 나는 이 할저씨가 왜 굳이 내 옆으로 와 말을 걸었는지 이유를 알아챘음

문신/청바지/에코백 이라는 키워드들이 조합되어 할저씨에겐 진보라는 코드로 읽혀졌고,
그는 애국보수 친구를 같이 까줄 젊은 여성 동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거기다 대놓고

드루킹

이라고 하면 할저씨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순간 궁금해졌으나 행패를 부리기엔 그가 나이스했기 때문에 관뒀다

할저씨는 이어 문정부 들어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좋아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
은행 흑자(?)가 이만큼 났는데... 하며 다시 파일에서 도표를 프린트한 A4용지를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도표는 매우 단순했다.
세로로는 하나, KB, 기업 등 은행의 목록이 적혀있고 가로로는 2016년부터 19년까지의 년도가,
셀 안에는 2조, 1조, 3조, 3조3천으로 박근혜때 줄어들다 정권이 바뀐 뒤 불어나고 있는 금액이 적혀있었음

이 그래프 하나로 나라의 경제지표를 판단할 수는 없는 거 같다, 라고 반박하자 할저씨는
아니다, 이것은 본인이 직접 은행 사이트에 들어가 체크하며 알아낸 정확한 정보이다. 라는 답을 함

아무튼 그는 듣고싶은 대답이 있었고 나로써는 생판 첨 보는 사람 비위를 맞춰줄 이유가 없었기에 그 후로 쭉 우리의 대화는 평행선을 그렸음

흥미로웠던 점은 그가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는 다른 증거로 내세운

' 젊은이들이 스타벅스에서 7,8천원 짜리 커피를 실컷 사먹지 않느냐 우리때는 커피가 다 뭐야 밥사먹을때도 벌벌 떨었는데 '

라는 사례가 박근혜 정부 때 수꼴 줌저씨들이 호황의 증거로 든 예시와 정확하게 같았다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도 지적을 할까 하다가 귀찮아서 관뒀다

아무튼 나는 할저씨가 별로 밉지 않았고 할저씨도 나를 미워하진 않는 눈치길래 우리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