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나다 2019.08.12 22:56
h는 예쁜 소녀였다.
조상님 중에 서양인이 계셨는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밝은 갈색이었고 주근깨가 살짝 얹힌 투명하고 흰 피부는 
짙은 녹색의 새 중학교 교복과 잘 어울렸다. 클레어 데인즈를 닮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역시 매력적이었다. 

h는 우리가 침냄새 나는 리코더를 불며 음악시험을 칠때 혼자 바이올린 연주를 했는데 
능숙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서구적인 외모와 바이올린을 턱 밑에 낀 자태는 썩 잘어울렸다.

어떤계기로 h와 친해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날부터 붙어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h가 또래보다 조금 순진한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h의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간 날이 있었다.
나는 h와 동생이 함께 쓰는 공부 방 벽이 차분한 남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사실에 한번 놀랐고(아파트 벽지는 흰색이어야되는데) 
그들의 책상이 자리잡은 모양새에 두번 놀랐다. 

주공 아파트의 공간 활용도를 최대화 시키기 위해 일말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벽에 바짝 책상을 붙여놓던 다른 집들과 달리
h의 부모님들은 대담하게도 방 한가운데에 두 책상을 마주보게 하여 정사각형 모양으로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다른 아줌마들처럼 파마를 하지 않고 소녀처럼 머리를 길러 뒤로 묶은 h의 엄마는 우리에게 주스를 가져다 주셨다.

거실엔 h와 동생이 쓴 시집이 놓여있었다. 
그것은 내가 집에서 스태플러로 찝어 제작하곤 하던 조악한 수제 책 같은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출판된 유광 코팅 표지의 '진짜 책'이었다. 
시들은 평이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그 '진짜 책'의 완전한 형태에 압도되고 말았다.

책의 날개 부분엔 h의 부모님들이 왜 이 책을 내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혀있었는데, 
그것을 읽으며 나는 가슴에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매우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그 뒤로 나는 h를 노골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했다. 
다툼의 계기가 있었던 것 같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아마 중요한 계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당시 h가 아니더라도 어울릴 수 있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그리고 그 애들 역시 h를 싫어했다. 
미움의 명목은 재수가 없고 돈자랑을 한다, 라는 것이었는데 사실 h가 우리에게 집안의 재력을 과시한 적은 없었다. 아마 과시할 만한 재력도 아니었을것이다.    

무시가 계속되자 h의 표정은 급속히 어두워져갔다. 
150와트 전구에 불을 킨 것과도 같던 미소는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고통의 표정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떨군 h의 단정한 옆모습을 훔쳐볼때면 나는 죄책감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느날 혼자 하교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h였다.
나의 팔을 잡은 그녀는

'왜 나를 무시하는건지 이유를 말해줘.'

라고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곧 표정을 감추고

'그걸 모르는게 바로 너의 문제야.'

라고 대답한 뒤 h의 손을 뿌리치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그것이 세련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니 방 벽지가 남색이고 부모님이 책을 출판해줘서 네가 싫어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h는 따라오지 않았고 그 자리에 잠시 서있다 곧 사라졌다.

우리의 관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회복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시기 나의 부모는 길고 소모적이던 결혼생활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 과정 중 꽤 많은 기억이 손실되어 버렸다. 뇌에는 싫은 기억을 지워버리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아무튼 h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붕어빵을 함께 사먹은 것인걸 보면 화해(?)를 하긴 했던것 같다. 
하지만 학년이 바뀌고 난 뒤 떠오르는 그녀와의 추억이 없는걸 보면 역시 그 후 자연스레 관계가 정리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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