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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이별의 순간

유 진 정 2021. 3. 2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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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순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 정신의학신문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이별의 순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기형도의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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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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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건 추억을 복기하는 겁니다. 찬찬히 시간을 거슬러 되짚어 보는 행위죠. 추억은 당연히 이별하기 전, 사랑했던 시간들입니다. 사랑했기에, 밤은 늘 짧았습니다. 창밖에는 겨울 안개들이 떠돌았습니다. 사랑하면 겨울 안개 낀 듯 시야가 흐릿해집니다. 사랑하면 겨울 안개가 살갗에 와 닿듯 찌릿합니다. 사랑했기에, 촛불을 좋아했습니다. 밤새 촛불을 켜놓아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종이만 보면 뭔가 쓰고 싶고 기막힌 문장이 줄줄 쏟아질 것 같지만, 막상 종이만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얼굴만 떠오릅니다. 그래서 흰 종이는 공포입니다. 지독히 사랑했기에, 매 순간 망설임이 나를 부여잡습니다. 망설임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눈물을 흘립니다. 지독한 사랑은 열망을 낳습니다. 그것은 욕망이나 야망이 아닙니다. 뜨거운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시간 동안 있었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 과거가 되었습니다. 흘러가 버렸습니다. 돌아올 수 없습니다. 시인은 그것들에 이별을 고합니다. 잘 있거라.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습니다. “잘 가거라.”가 아니라 “잘 있거라.”입니다. 나는 남아서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그것들은 남고 내가 떠나가는 겁니다. 이별 후에 사랑할 때 겪었던 모든 추억과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추억과 시간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나만 홀로 흘러가는 겁니다. 그래서 함께했던 우리의 집은 빈집이 되고 맙니다

 



황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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