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세계

한 생 안 난 셈 치라

유 진 정 2025. 9. 17. 17:49

 

도반 분 댁에 놀러갔다가 책을 빌려왔다. 앞의 몇 페이지를 읽어보는데
오 이건 찐이다. 

활성스님이라는 분이 하신 법문을 엮은 고요한 소리라는 소책자들인데 (가격 천원 )
이분이 출가하여 수행하다 느즈막히 시작하신 법문을 엮은 것이라고 

늘 여러가지 팁을 주시는 S님께서 스님이 쓴 책 고르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일단 스님이 써서 출판한 책은 X
스님이 법문한 것을 이거는 책으로 내야된다!! 하고 다른 사람이 옮겨 적어 출판한 책 O

이게 말이 참 되는게
출판하려고 자기 이름 걸고 뭔가를 쓰는 행위에 ego나 주관이 들어가지 않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건 블로그만 해봐도 잘 알 수 있다.

근데 다 내려놓은 출가자가 각잡고 앉아서 저술을 하겠소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부처님 그 자신도 기록을 직접 남기지 않으셨고 말씀은 모두 제자들이 외워 전승된 것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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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요한소리>를?

왜 하필 <고요한소리>를 하게 되었을까요? 그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한국 불교는 이른바 대승 불교입니다.
소의경전으로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등의 대승 경전에 의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종래의 우리 불교가 매우 종교적이에요.
나는 종교인이 되고 싶어서 출가한 것은 아니거든요.

부처님은 우리에게 종교인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종교인이라는 것은 벌써 눈이 어디 갇히고 한정되어서 맹목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맹목이야말로 부처님이 가장 경계하신 것이거든요.

오늘날 우리 인류가 얼마나 맹목적입니까. 
아까도 내가 천재天災, 인재人災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것 모두 맹목적인 데서 오는 것 아닙니까? 
만일 한국인들이 좀 더 깨어있고 의식 수준이 높다면 과연 오늘날 이 나라나 이 민족이 겪고 있는 이런 시련을 꼭 이런 모습으로 겪어야 할까요?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닐 수 있는데 이러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탓이에요.

그 원인을 일단 불교 안에서만 볼 때 부처님은 종교 창시자가 아닌데
우리는 부처님을 종교 창시자 내지는 신으로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마치 신 받들듯 이 부처님을 받드는 이런 풍토가 지배적이에요.
이래서는 부처님이 오신 보람이 없고 오히려 이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출가하면서부터 해왔습니다. 

P14-15

 

이 시대 인류가 그야말로 위기에 처해 있지요. 
과학은 청맹과니지요.
자본이 뒤에서 밀어주고 인류의 세속적 욕망이 목표를 설정하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조건 내닫는게
오늘의 과학이고 기술 아닙니까? 

그건 눈 먼 과학이에요. 지금 그러한 과학이 인류를 이끌고 벼랑 끝을 향해 질주하는데 
이럴 때 부처님의 법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이런 과학의 질주를 제어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아서 틀 것은 틀고 꺾을 건 꺾고 해서 과학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하는데 그걸 누가 하겠습니까?

많은 이데올로기가 그걸 하겠다고 나섰었지요.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온갖 것이 나왔었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전부 다 참담한 실패입니다. 그럼 종교는 어떻습니까? 그걸 할 수 있는 건 종교일 수 있는데,
지금 현재로선 어떤 종교에서도 그걸 할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요. 매일 신문에서, TV에서 보니까 다들 잘 아시겠지요.

다시 말하면 종교로서의 불교도 그런 일은 해낼 수 가 없습니다. 
불교에도 종교의 색채가 너무 짙거든요. 

그러나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부처님 원래의 진리 불교, 진리로서의 불교, 진리 전달체로서의 법, 
이것이 꼭 그 역할을 해낼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인류는 결국에 진리를 모른 채로, 아니 모르기 때문에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뭣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요.

오늘날 심지어 과학자들마저 지구 멸망을 상정하고, 
어느 별나라에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인류의 기지를 만들 꿈을 꾸고 있을 만큼 상황이 긴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을 두고 과거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인류 업보의 당연한 과보입니다. 업보業報입니다. 
인류 스스로가 살아 온 역사는 것이 업보의 역사 아닙니까? 그럼 그 업보는 인류 책임이지요. 
그걸 하늘이나 신의 탓으로 돌리려는 게 그게 아니다 이 말이지요.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건 뭐 어떤 대책도 없는 것 아닙니까? 
신에게 그냥 제발 그만두시고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런다고 되겠어요?

P34-38

 


중국에는 중용이 있고 서양에는 황금률 golden mean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추상적입니다. 그렇지요? 추상적입니다.
중!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양쪽 극단을 다 피하면 그게 중인가? 그러면 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중국에도 있었고 서양에도 있는 중, 중이라는 이상을 부처님도 일단은 긍정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은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중을 취한다고 하면 회색분자나 어중간한 소극분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뭔가가 없습니다. 그저 추상적인 개념 놀음이거나 아니면 세속의 처신술에 그쳐 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현실에서 사는 태도는 대단히 애매모호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 자세로 어떻게 진리를 찾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이 중을 설하시면서 양변을 떠나다면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는 의문에
 '팔정도를 걸어라.'고 확언하신 겁니다.

아시겠어요? '양변을 버렸다.' 좋습니다. 
그럼 중을 취해야겠는데 그 중은 어떤 것이냐?
애매하고 사실 구체적으로 당면하면 이게 정말 어렵고 용기 안 나는 일입니다.
양변을 버리는 거야 폐단을 눈으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데,

그래서 ' 이거다. ' 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회피주의, 회색주의, 또는 거부, 극단의 거부, 내가 너무 막가지는 않겠다, 뭐 이런 정도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부처님이 팔정도를 말씀하심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팔정도야말로 부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P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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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는 나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글은 여기까지 옮긴다. 
뒤에 이제 육처육근 신수심법 나오는데 머리 아프다. 교학이 부실한데 공부가 싫다.
그래도 이거 읽고 나니까 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듬

 

https://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057

 

[스님의 명법문] 나의 출가 인연이야기 / 활성스님 - 불광미디어

| 경봉 스님과의 인연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법문한 적이 없습니다. 규모 자체가 약간 버겁습니다. 정말 옳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막막하지만, 이럴 때 해야 할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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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스님 검색했더니 나온 출가스토리 
한 생 안 난 셈 치라 눈물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