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소리 역경원에서 콜택시를 타고 노고단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중간에 기사님이 길을 한번 잘못들고 나는 노고단 게하가 노고단 근처인줄 착각해서 에로사항이 있었다.
노고단 게스트 하우스는 노고단(성삼재) 코 앞에 있지 않다!
여기서 성삼재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이다.
1. 아침에 버스를 타고 구례공용터미널로 가서 화엄사/성삼재행 버스 탑승(3천원) 금토일 주말 or 성수기에만 가능
2. 게하의 픽업서비스 활용. 이건 안 되는 날도 있으니 도착전 미리 예약하거나 해야함
3. 콜택시 (5만원 전후)
나의 계획은 1이었으나 이날은 공교롭게도 구례에서 아이언맨 대회가 열리는 날이라 버스가 죄다 운행중지된 상태였다.
사실 게하도 선수들만 묵게 하는 상황이었으나 예약 플랫폼 한 군데가 실수로 창을 열어놔서 내가 거길 통해 들어오게 된 것
평소에 무지 아까워 하는게 택시비인데 어제 오늘 택시비만 10만원 넘게 지출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인게 택시 없으면 여기서 뭐 할 수 있는게 없다. 걍 존재 자체가 고마움
그리고 대회 때문인지 여자 도미토리 룸이 텅 비어서 혼자 쓸 수 있어 좋았다.
게스트 하우스의 로비는 제왕적 구조를 띄고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일종의 복도를 걸어 저 에어컨 앞 노트북 뒤의 사장님을 배알하게 되어있음
전화로 문의했을 때 목소리가 퉁명스럽던 사장님은 티비에도 나온 산꾼이자 작가이시라고 한다.
내 종주 루트를 듣더니 벽소령 대피소를 당장 연하천 대피소로 바꾸라 하셨는데 정말 유용한 조언이었다.
보통 비라더니 비가 쏟아졌고 강풍이 불어서 안 바꿨으면 공포의 시간을 더 길게 보낼뻔
저녁에 나와 김밥 먹는데 잠깐 이리 와보라고 하시더니
검은 산 중턱에 별처럼 박혀 있는 노란 불빛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키셨다.
거기가 내일 당신이 갈 성삼재입니다, 하시는데 어쩐지 감동적이었다.
이 부근은 원래 지리산 온천 휴양단지로 번창했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는 가장 큰 온천이 폐쇄되는 등 쇠락하고 있으나 이 게하만은 활기를 띄고 있다.
사장님이 게하를 끼고 도는 간단한 히든 코스도 알려주셨다.
구례 공용 터미널에서 7-9 농어촌 버스를 타고 지리산온천 하차. 게하에 도착해 짐을 내리고,
게하에서 6km를 걸어 성삼재에 오른 뒤 그대로 노고단 찍고 (노고단 정상은 국립공원 사이트에서 미리 예약해야됨)
화엄사 쪽으로 하산한 뒤 다시 버스로 게하로 돌아와 숙박
차비가 적게 들고 한적하며 멋진 루트라고.
여기서 가을단풍이 보고 싶으면 피아골로 하산해도 되고, 게하 근처에 아직 운영 중인 온천들이 세 곳 있으니 다음날 온천을 해도 좋다고 한다. 가족 온천이라는 곳엔 노천탕도 있다고
저 성삼재-노고단 코스는 길이 아주 편하니 한겨울 눈 올 때 이렇게 와도 좋을 거 같다.
목에 분홍색 방울을 단 깔끔한 고양이들과 눈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일기 쓰고 역경원에서 주신 고요한 소리 신간을 좀 읽다가 명상하고 잤다.
종주에 앞서 서원을 두 가지 세웠다.
- 목적지와 시간에 집착하지 말것
- 명상 안 빼먹기
아침에 일어나 띵상 한시간 하고 옥상 구경
7시에 오기로한 콜택시가 조금 빨리 도착해서 바로 출발했다.
어제 남원발 택시 기사분도 그렇고 기사님들이 굉장히 친절하시다. 전라도는 남자들이 확실히 애살스럽달까..
이 부근은 벚꽃이 필 때 매우 아름답고 자전거로 다니기 좋다고 한다.
구례라는 지역의 분위기는 나도 알고 있다.
10년전 화엄음악제 때 처음 와서 바이브가 좋은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한 듯
그 다음 해, 다다음 해는 통역과 인솔 스탭을 해서 놀러갔을 때만큼 감동적이진 않았지만 생각하니 또 추억이군..
음악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지리산 반달곰인가요? 여쭤보니 그건 아니고 예전 차에 달아놨던 건데 애착이 생겨 계속 데리고 다니는 곰이라는 설명
1시간 쯤 달려 성삼재 도착
약간 걱정이 되었다.
오기 전에 아무 생각없이 프룬을 왕창 집어먹었다가 이틀 동안 폭풍설사에 시달리고 1kg가 빠졌다.
거기다 미열에 기침도 나오는데 비까지.. 종주의 시작치고는 약간 불길하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새우탕면을 하나 사먹었더니 갑자기 기운이 싹 돌아오는게 염분이 부족했나?
편의점은 품목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주인이 쓰레기에 예민하다.
남은 새우탕 버리면서 별 생각없이 가지고 온 물건도 버렸는데 그걸 왜 거기 버려욧???? 하며 엄청 꾸사리 먹었다.
외부 쓰레기 절대 반입 금지라고.
하긴 얼마나 많은 하산객들이 편의점 보자마자 쓰레기를 버리려 시도했을지..
편의점 옆 벤치에 앉았다가 일어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당신 앞에 쓰레기 다 가져가라고 외치길래
제거 아닌데요~ 얄밉게 말하고 나왔다. 내 앞에 앉았던 팀이 물병 세 개와 아이스팩 세 개를 그대로 놓고 갔다.
사람들이 쓰레기 처리에 민감해지는 이 지점부터 본격적으로 산! 이라는 느낌이다.
곰돌아 나 잘 할 수 있겠지?
우비 뒤집어쓰고 비닐봉투 두 장 아래를 찢어서 신발에 끼우고 고무줄로 고정. 야매 스패츠 완성
여기서부터는 폰 안 꺼내고 걍 열심히 올라갔다. 노고단까지는 뭐 등산도 아니다. 포장도로임
노고단 대피소 레인저 분이 혼자 갑니까? 조~심히 가세요잉
이라는 말을 하셨는데 남쪽 방언에는 확실히 소울이 있다.
끝내주는 곰탕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 삼도봉입니다.
여기 이후로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다 하산했나봄
갓뎀
저 바람소리를 들어봐
정말 즐겁네요.. 행복해..
위 영상 찍다 후면버튼 실수로 눌렀는데 표정이 가관이라 그대로 셀카 찍음
근데 저 때만 해도 사실 살 만했다. 그니까 사진도 찍는 여유를 부린 거
더 올라가니까 바람이 너무 불어서 비가 수평으로 내리고
급기야 부실한 나뭇가지들이 막 분질러지더니 공중에서 후둑둑 떨어지기 시작
머릿 속에서 워스트 케이스 시나리오 막 써짐
1. 나무토막에 머리를 맞음 - 기절 - 넘어지면서 뼈가 또각또각 분질러짐 - 그 상태에서 곰에게 발견됨
2. 나무토막에 머리를 맞음 - 기절 - 넘어지면서 뼈가 또각또각 분질러짐 - 정신이 든 상태로 곰에게 발견됨
그래도 산이라 낫다. 이럴 때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면 삶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겁나니까 조영남의 갓띵곡, 화개장터를 마구 부르며 걷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w1lhGDO1qM8
비닐 스패츠는 기능을 잃었다. 어항이 된 신발 속에서 발가락이 헤엄을 친다.
한 발 내딛을 때 마다 쥽븁 하고 발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꽤나 별로다.
길은 이게 길인지 개울인지 싶고 젖은 나무들은 색이 짙어지고 매끈해져 요염해보인다.
월동 준비 중인 다람쥐를 여럿 마주쳤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수고가 많다.
우비가 발 디딜 곳의 시야를 자꾸 가리길래 고무줄로 묶어버리고 거의 트레일 러닝 수준으로 내달렸다.
오 대피소 sweet 대피소 ...!
지도를 보니 예상시각보다 무려 1시간 반 빨리 도착. 나 진짜 열심히 왔어. 살고 싶어서..
2시쯤 도착했고 체크인이 세시라 탈의실에서 떨고 있는데
결혼시장에서 빨리 팔려나갈st 대피소 훈남 직원 분들이 자비를 베푸셔서 30분 일찍 입갤
흙탕물에 젖은 바지와 신발을 빨아서 라디에이터에 올린다.
오늘 여자 숙소에는 나 말고 다섯이 더 묵는다고 한다.
라디에이터에 신발 올려 놨다고 뭐라하는 까다로운 숙녀들이 아니기를
한 시간 정도 정리+수습을 하고나니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 밥도 해먹기 귀찮아!!!
마카다미아 봉지를 뜯어서 입에 털어넣고 떡이랑 고추참치 뜯어서 그냥 안 나가고 침상 위에서 우물우물 먹는다
교감신경 풀가동이라 배도 별로 안 고픔
그렇게 두세시간 쉬고 있는데 경상도 아지매 네 분이 아이고아이고 하면서 들어오심 이것은 굿 사인
신발 안 내려도 되겠군 ㅋㅋ
아주머니들께 신발과 깔창 위치시키는 요령을 설명하고 다같이 사이좋게 신발을 말리기로
한 분이 밥하러 가야되는데 슬리퍼를 안 가져오셨다길래 내거 빌려드렸다. 어차피 7시까지 절대 안 나갈거라..
아주머니들 삼겹살 가져왔다고 같이 먹자 하셨지만 배가 안 고파서 거절
식사들 하시는 동안 방에서 명상했다.
55분 정도 했을 때 젊은 여자분이 힘들어 힘들어.. 속삭이면서 들어오시길래
내려가서 라디에이터 자리를 만들어 드렸다. 나중에 들으니 화엄사에서 출발하셨다고 하는데 ㄹㅇ힘들었을듯
나도 사실 화대종주 하려다가 여유롭게 다니려고 성중종주로 계획을 바꾼 거다.
화대종주는 이름부터 뭔가 화끈하고 대단한 종주 같고 (화엄사에서 시작해 대원사로 끝남 45km)
성중 종주는 성스럽고 중도적인, 부드러운 어감의 쉬운 종주 같음 (성삼재에서 시작해 중산리로 끝남 35km)
느즈막히 취사장으로 나가 미역국과 전투식량을 먹는데
말 없이 조리 중이던 아저씨가 갑자기 사탕봉투를 쑥 내민다.
하나 빼가니 ' 더 가 가요 ' 하시길래 몇 개 더 집어들었다.
그러더니 ' 평가. ' 라고 하시길래 네? 하니 ' 맛 평가. ' 라고..
과묵하고 친절한 아저씨였다. 다음날 아침 똑같은 방식으로 자일리톨 껌을 주시길래 보답으로 포도당 캔디를 몇 개 드렸다.
그러고 보니 껌 참 괜찮은 아이템이네 이도 못 닦는데..
밥을 다 먹고 둘이 온 아저씨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못 먹은 삼겹살은 두 분이 잘 드셨다고
그런데 뭔가 특이한 조합인게 한 분은 아주 여유롭고 한 분은 죽어가고 있었다.
알고보니 생산성 본부에서 하는 ceo과정 같이 수강한 동기신데
죽어가는 분이 종주 해보고 싶다고 해서 여유로운 분이 가이딩을 해주는 중이라고 한다.
여유로운 분은 철인 3종도 여러번 하셨고 지리산 트레일 러닝도 수회 완주한 베테랑이었다.
처음 했을 땐 발톱이 8개 빠졌는데 이제 2개만 빠진다고 한다.
상어 이빨도 아니고 빠진 발톱 다시 나는게 신기하지 않아요?
라고 말하자 마자 사회적으로 적절한 반응은 어머 세상에.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취사실 문이 드륵 열리더니 검은 옷을 입은, 폭싹 젖은 할저씨가 들어왔다.
지금 오신거냐, 빨리 대피소에 등록해라, 7시 넘으면 안 해주지만 얼마 안 넘겼었으니 해줄거라고
여유로운 아저씨와 내가 안내를 했는데 이 사람 대답을 안 한다.
눈만 휘둥그레 해가지고 두리번두리번.. 마치 넋나간 재해 생존자 같은 모습
뭐지 싶었지만 피곤하니 이 닦고 자러간다.
흙에 뭔 성분이 들었는지 마른 바지가 스팽글을 붙인 것처럼 반짝반짝 해졌다.
발톱이 너무 길다. 등산화에 닫으니 불편하다. 칼로 좀 잘라보다 발가락이 잘릴 거 같길래 그만뒀다.
2층에 누워 갱상도 아지매들의 수다를 엿듣는다.
내용도 귀엽고 조용조용 읊는 경북사투리가 감미롭다.
' 이기 그 포켓 타올이다, 이래 적시면 쫙 펼쳐지는데 '
' 신기하다!!!! '
' 와~~~~~~~~ 이란게 다 있노!!! 재활용 해야겠다! '
' 00이가 알려줬나? '
' 응 '
' 내가 일전에 손가락을 비아가, 밴드 위에다 유리테이프를 칭칭 감아 다녔다 아이가,
그거 보더니 누가 그라더라, 딸이 없소?'
' ㅋㅋㅋㅋ 딸이 없소 ㅋㅋㅋㅋ '
' 그 방수 밴드가 있다 안 카나, 딸이 있으면 그란걸 다 알려주는데 딸이 없으니까.. '
' 노인학교 가면 딸 없는 노인들은 촌~~~~스럽게 해 가지고... '
' 지난번에 안내 산악회 그걸로 해가 왔는데 너무 빨리 가야 되더라, '
' 앞만 보며 산 타는 거, 별 의미가 없더라 나는. '
' 아까 그 아저씨, 남양주에서 뱀사골로 해서 올라왓단다.
먹을 것도 랜턴도 신분증도 아--무것도 읎이 물병 하나 들고 올라왔다카데 '
아까 그 이상한 할저씨 말하는 거 같길래 2층에서 고개를 쭉 빼 그 분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봤다.
예약도 안하고 무대뽀로 그렇게 올라온건데,
비도 오고 랜턴도 없는 사람 이 밤길에 하산시키는건 걍 조난 당하라는 소리니까
직원들이 라면 하나 끓여먹이고 재워준 담에 내일 아침 하산시키로 했다고
역시 정신이 조금 온전치 못한 분인가 싶었는데 이쯤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이것은... 너무나 김전일스러운 상황이다!
- 악천후에 고립된 대피소 -
CEO 과정 동기 둘 ( 알고보니 한명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
친절한 경상도 산악회 아지매 4 + 아저씨 3 ( 알고보니 치정관계로 엮여있다는 설정 )
과묵하고 친절한 아저씨1 ( 어두운 과거가 있다는 설정 )
둘 다 치과의사인 젊은 부부 ( 여자 쪽이 먼저 희생될 예정 )
대피소 훈남 직원 둘
뱀사골에서 올라온 신원미상의 남자
망상적인 블로거
다음날 아침 의사 부인이 차디찬 시신으로 발견되고..
남편이 법의학적 소견으로 사망시점을 밝혀내지만 모두의 알리바이가 갓벽한 상황,
외부로부터의 침입의 흔적은 없는데..!
뭐 이런 잡생각하다 잠들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