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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3) : 자애수행 실천 방법 (상가락키따 스님)
불교의 가르침을 통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3) 상가락키따 존자님 - 춘천 월정사 문화원 초청법회 (2025년 5월 29일) ▷ 다음 생에도 마주 보는 인연 법회를 시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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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실용적이고 재밌어서 읽어야 되는 책은 안 읽고 PDF파일로 만들어 후다닥 읽었다
저건 3편이고 카페에 1-4편 다 있음
미얀마나 서구의 스님들이 설하신 법문들 중에도 좋은게 많지만
모국어로 듣는 법문은 좀 더 와닿는 면이 있다.

상가락키따 반떼(테라와다 불교에서 스님을 뜻하는 말)는
20여년 전 불교OG국인 미얀마로 출가하여 그쪽에서 수행을 하시는 분인데
한국에 가끔씩 들어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신다고 한다
영상을 보면 한순간 한순간 알아차림을 놓지 않고 말하시는게 느껴져서 놀랍고
옛날 영상보다 지금이 더 편안하고 아름다워 보이시는게 수행의 상당한 동기부여가 된다
아무튼 법문을 퍼왔음
전체 다 옮기면 안 읽을 거니까 발췌해서 올려둠 굵은 글씨는 내 임의대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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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종종 말씀드립니다.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어 다시는 이런 배우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그 업력을 줄여 가셔야 합니다.
세간에서는 미워하고 증오하고 밀어내는 업력이 작용하면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업의 형성력 때문에, 관계의 업력이 과보를 줄 때 오히려 서로를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러니 기억해 두십시오. 업은 하나의 형성력이기 때문에 멀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종류의 업을 쌓든 그 업은 서로를 끌어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업을 쌓느냐입니다.
서로에 대해 미움과 증오, 질책과 무시 같은 업을 쌓는다면 같은 종류의 업력으로 다시 끌어당기게 됩니다.
고통의 악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도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는 의도였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위라는 것은 반드시 결과를 주는 업의 힘을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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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을 얻은 것은 생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온이고 거기에는 자아가 없는데, 그것을 자아라고 아는 그릇된 인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윗자avijjā, 곧 무지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자아라는 인식이 형성되면 그 자아에 대해 갈애, 곧 딴하taṇhā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갈애를 일으킨 것을 꽉 움켜쥐고 소유하려는 집착, 곧 취착인 우빠다나upādāna가 생겨납니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똑같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집착이 없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정말 싫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으면 싫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한 만큼 만족이 없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익숙하게 집착해 온 자기 자신에게 자애를 펼치라고 권합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만큼 다른 이를 사랑하고 아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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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자신에게 불만족이 많은 분들은 자애관을 많이 닦으시면 좋습니다.
이것은 제 경우라기보다는 제가 만났던 수행자분들의 경우인데, 자애관 수행을 할 때 자기 자신에게는 도무지 자애를 일으킬 수 없다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 분일수록 더 애쓰셔야 합니다.
저는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보살펴 왔어야 하는데 계속 자기 혐오만 쌓아 왔다면,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의 태도가 하나의 습관이 되어, 자기 자신을 떠올리기만 해도 불만족스럽고 싫은 것입니다.
그 느낌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애를 개발하는 바른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싫은 것은 내 욕심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 욕심만큼 되지 않는다고 거듭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애는 내 욕심을 채우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애는 내 자신이 정말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자신의 욕심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내 욕심 때문에 생긴 불만족 때문에 자애를 펼칠 수 없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자애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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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세간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애의 차이를 말씀드렸지요.
사랑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에게 어떻게든 만족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적인 쾌락이든 물리적인 이익이든, 어떤 종류의 만족감이 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부터 불만족이 생겨나면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자애는 자신의 이익을 미리 계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다른 존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애의 마음을 확장할 때에는 공감하는 훈련이 필요한데, 공감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자꾸 벗어나 보는 훈련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잠시 타인의 입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듯이 그 존재도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런 관점에서 그 존재의 입장에 서 보면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잠시 타인을 중심으로 옮겨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인의 관점에서 느껴 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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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경계를 넓혀 가는 과정에서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선순위를 두지 말아야 할 대상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띱삐야 사하야까atippiya-sahāyaka라고 하여,
자신이 너무 애착하는 존재는 1순위로 두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 애착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자애를 보낸다고 해 놓고도 문구만 자애일 뿐 마음은 자연스럽게 세간적인 애착으로 흘러가 버리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애의 가까운 적인 라가rāga, 곧 애착, 자애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자애가 아닌 것으로 쉽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
보통 외부의 대상으로 향할 때 첫 번째로 우선순위를 두기에 적절한 대상은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으면서도 애착이 아닌 존중심을 지닌 존재입니다. 가루바와니야garubhāvanīya는 존중할 만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곧 자신과 가까운 관계이지만 그것이 애착이 아니라 존중심인 경우입니다.
그래서 세간에서 자애를 형식화할 때는 보통 스승에게 먼저 보내라고 합니다.
스승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스승에게 지니는 마음은 보통의 세간적인 애착과는 다른 종류의 마음이지요. 고마운 존재이지만 애착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중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꼭 스승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정말 가까운 사람이지만 존중할 만하고 본받을 만하며 정말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그 대상에게 우선순위를 두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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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인 대상도, 자신이 능숙하게 훈련된 상황이 아니라면 자칫 감각적인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삼가십시오. 선정을 개발할 때는 이성 개인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금하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안 된다기보다는,
선정을 개발하는 데 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처음부터 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다수는 괜찮습니다. 한 대상을 표상으로 삼다 보면,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음의 표상으로 떠오를 때 실물보다 훨씬 예뻐 보입니다. 더 밝게 빛나 보이고 더 젊어 보이고 예뻐 보이니, 아무래도 마음이 더 탐착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이성이라도 다수를 대상으로 할 때는 수행에 큰 장애가 없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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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고통스러운 존재를 볼 때 일으키는 보편적인 감정이 슬픔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연민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슬픔은 선업의 마음이 아닌 것을 아시지요?
도마낫사 웨다나domanassa-vedanā, 곧 정신적인 불만족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래서 슬픔은 도사dosa, 곧 성냄의 다른 성분입니다.
선업의 마음이며 무량한 가치로 확장될 수 있는 연민과는 전혀 성분이 다릅니다.
그런데 비슷한 형태로, 비슷한 상황에서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연민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착각 때문에 연민심을 개발하면서도 마음이 슬픔에 빠졌는데 그것을 연민심인 줄 알고 지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고통을 인식할 때 거듭 슬픔이 올라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때 슬픔은 연민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그 슬픔은 무엇이라고 했지요? 불만족입니다.
어떤 불만족일까요? 예전에 자신이 기대했던 상황이 기대하지 못한 형태로 경험되며 생긴 상처들,
그것에 대한 불만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은 불만족의 성분이고, 도사, 곧 성냄의 한 표현 방식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화는 아니지만 내면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어떻게 연민을 개발해야 할까요?
연민의 성분과 정의를 다시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이런 불만족을 개선하는 것이 연민의 목적이 아니라,
그런 슬픔, 그런 부정적인 감정과 번뇌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연민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연민을 보낼 때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자신이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지만, 자기 자신이 수행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대상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슬픔에서 자유롭기를, 그런 부정적인 업력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하고 반복해서 연민을 개발하셔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도 슬픔에 빠지면 슬픔에 빠진 상태를 바로 자각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민을 개발한다고 하면서 내면의 상처를 더 가중시키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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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반떼,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인간관계에서 견딜 수 없이 힘들다고 판단될 때는 관계를 끊는 쪽을 선택합니다. 제가 해결할 수 없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다가 더 큰 불선업을 짓기보다는, 차라리 거기서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것이 혹시 회피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선택을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지혜로운 방법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저는 회피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 보호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정신적인 근력이 그 대상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과보로 다가오는 조건들은 피할 수 없지만, 관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지혜로 조율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능하면 부정적인 에너지를 생산하는 종류의 단절은 좋지 않습니다.
'내가 거리를 두는 것은 그 사람이 밉고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더 긍정적인 에너지를 유지하며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 그렇게 잘 보호된 마음이 상대를 보호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다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긍정적인 마음의 태도로 거리를 조절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근력은 본인께서 판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관계의 바운더리는 우리 집에 울타리를 치는 것처럼 일정하지 않습니다.
100사람과의 관계가 있다면, 저는 100사람마다 각기 다른 관계의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자님께서 현명하게 그 관계의 적절한 거리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공감은 유해하다. - 공감의 배신 by 폴 블룸
(전략)아무튼 그래서 공감의 문제는 대체 무엇인가.첫째, 공감은 힘이 셈 문제는 공정성과 이성처럼 중요한 가치보다도 훨씬 쎈 미친놈이라는 거임 대니얼 뱃슨이라는 학자의 실험을 예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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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 사랑의 기술
사랑 듣기만 해도 마음이 숙연해지는 말이다. 막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 앞에 딱 버티고 서있으면 양 손을 배 위에 모아 얹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그런 이미지 어릴 때는 남녀간의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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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도 다 저 얘기
 진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