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쟁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하려고 하는게 아니고 그냥 자꾸 남
일전에 만난 홍기하 작가의 차 트렁크에 WAR IS OVER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봤고, 그 다음날 대전 현충원에 다녀왔기 때문인 것 같다.
대전 현충원에는 6.25때 돌아가신 아저씨의 아버지가 묻혀 있다.
원래 6월이 되면 아저씨와 엄마 둘이서 방문을 하고 오셨는데, 돌아가신 분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고마운 것이 있어서
이번엔 따라가겠다고 부탁을 했다.
고마운 것이 무엇이냐면 두 분이 이제 나이를 먹으셔서 병원에 다닐 일이 늘어났는데 유공자 자녀/배우자 의료비 혜택이 상당하다.
이십대 중반 모친의 수면제 소동 이후로 집에 들어가 영어강사를 하던 시기 모친이 만두 먹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우리 둘 중 한 명이 중병에 걸려 감당이 불가능한 액수를 치료비로 지출해야 되는 경우가 생기면
서로에게 빚을 지워 고통을 주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죽자는 제안이었다.
아이씨 또 무슨 청승인가, 속으로 짜증이 확 나서 알았어! 라고 대답하고 먹던 만두 마저 먹었는데
다 먹고 생각하니 둘 중 먼저 중병에 걸릴 확률은 아무래도 모친 쪽이 높았을 것이기 때문에 나름의 배려였나 싶어서 착잡해졌다.
아무튼 저런 말도 들었고, 모친의 노후 의료비에 대해서는 이십대 내도록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부담이 덜어지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뒤로 마음이 상당히 가벼워져서 해야지 하고만 있던 데뷔도 후다닥 했다.
웬일로 현충원까지 행차할 마음이 들었냐는 질문에 '두분 의료비 혜택 개꿀 -> 돌아가신 분에게 고마움'
이라고 대답했다가 '아이고 이 녀석아 나라를 지켜주신 걸 감사해야지ㅎㅎ' 라는 핀잔을 들었다.
도착 후 인파로 바글거리는 방문객 매점에서 조화 한 다발과 국화 한 송이를 구입했다.
현충원 꽃다발은 무조건 조화만 사용한다고 한다. 이유는 생화는 교체를 자주 해야 해서 쓰레기가 너무 많아진다고.
아무튼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현충원에 입장했는데, 곧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저씨의 아버지 하일천 이등중사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격전지, 금화지구 전투에서 사망하셨다고 한다. 당시 나이는 스물 한 살
아저씨에게 아버지와의 기억이 있으시냐 물으니 없지! 내가 한살때 돌아가셨는데!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제주에서 훈련을 받을 때 모친이 막 낳은 아기를 데리고 내려와 아들 얼굴은 한 번 보셨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더니 뜬금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길래 다시 잘 집어 넣었다.
아저씨는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의 묘에 싸온 음식들을 주섬주섬 배치하고 소주를 한 잔 따라 올렸다.
현충원은 정말 넓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다.
호국 영웅이라는 글귀를 여기저기서 읽었는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호국이고 영웅이고 스물 한 살의 젊은이가 갓난아들과 젊은 부인을 두고 얼마나 죽기가 싫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호국부터 되어야 마누라도 애도 살고 하겠지마는 죽은 뒤 영웅이라는 단어로 치켜 세워 주어봤자 참가하고 싶어서 전쟁에 참가한 남자가 몇이나 되겠냐는 거다.
나가면서 전쟁 중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위패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 공간을 들렀는데 가끔씩 붙어있는 흑백사진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젊었다.
출구 쪽에 뿔테 안경을 끼고 최신 군복을 입은, 너무 평범한 청년의 컬러 사진이 한장 꽂혀 있길래 아니 왜 요즘 사람이 있나? 하고 충격을 받았는데 천안함이 떠올랐다.
종전이 아닌 휴전 중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지금 생각하니 육군 제복이라 천안함 실종자는 아닌듯)
아무튼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전쟁은 복잡하게 포장된 형태의 살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이념이나 사상, 종교, 불경기 등의 변명을 내세워보았자
그 본질은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 만나던 A는 전쟁을 동경했다.
반전집회에 공연을 하러 갔다가 저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데요. 라고 소신발언을 하는 바람에 엄청난 야유를 들었다고 한다.
A는 야심이 있는 똑똑한 젊은이였기 때문에 현실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A가 전쟁을 동경하는 이유를 곧 눈치챘다. 전쟁이 나면 계급전복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큰 흐름을 보자면 전쟁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고 역사의 한 챕터가 닫히고 다시 시작될 때 필요한 일종의 리추얼이라고 생각한다. 옛 것을 소멸시키고 새 것을 등장시키는 거대한 힘 같은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나는 그 흐름 중 희생되는 개인의 드라마에 집중하게 된다.
그 비극을 외면할 수 있을만큼 강한 목적성을 가진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혜화동 길을 걷다가 WAR IS OVER 스티커가 붙은 자동차를 맞닥뜨렸다. 설마 다른 차겠지 하다가
2022년의 대한민국에서 이런 스티커를 붙이고 다닐 만한 인간은 별로 없을 것 같아 홍기하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본인의 차가 맞고 근처 치킨집에서 전시 뒤풀이 중이라길래 잠시 들러서 이야기를 나눴다. 전쟁 이야기도 한참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