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세계에요

파괴적 우울

유 진 정 2022. 10. 25. 15:21

비탄에 잠긴 노인 - 반 고흐




일전에 처음 보는 사람과 뭘 좀 같이 했다
나이가 많은 남자분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시작부터 좀 시그널이 어긋난다는 느낌이 있었다.

도착시간을 묻길래 말해주고 도착해서 볼 일 보는데 끝낸 후 폰을 보니 보이스톡이 여섯 통이나 와 있었다.
헉 뭔 일 났나?? 후다닥 콜백하니 아 비도 오는데 여자 분이 오신다길래 본인이 마중을 나갔었다고..

내가 여기를 한 두 번 오는 것도 아닌데 굳이? + 그럴거면 도착 시간 물을 때 말을 해뒀어야 하는거 아닌가? 싶었지만
지적하기도 뭣한 상황이라 그러셨냐, 전화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다 하고 넘어갔다.

그는 배운 사람같았으나 ' 00씨는 00한 타잎인 것 같고 유진씨는 00한 사람 같은데 맞죠? '
등 초면에 갑자기 인평을 하는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모습을 보였고, 그래서 가능한 말을 적게 섞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일을 보는데 메뉴얼을 무시하고 본인의 방식대로 진행하길래 그때는 지적을 몇 번 했다.
중요한 부분이니 메뉴얼대로 하셔야 하고 00는 시간을 잘못 알고 계신다고

그러고 한 5분쯤 지났는데 이 사람이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

' 나를.. 너무 압박을 주네.. 나 없었으면 당신 혼자 이거 다 했어야 했어 (중략) '
그러면서 긴 훈계를 반말로 이어 갔는데, 그 와중 나를 단 한 차례도 쳐다보지 않고 그 일본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처럼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중얼거리길래 속으로 기겁했고 어이도 없길래 한 마디 했다. 지금 제가 선생님한테 그런 말 들으려고 여기 있는게 아니고 일하러 온거라고

나중에 그 일에 대해 보고하니 그 분이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계신다는 답이 돌아왔다.
본인이 제일 힘들겠다 싶었지만 불안정한 사람에게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일을 맡기면 안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분은 일을 그만두셨는데, 며칠 후 문서 담당하시는 분에게 톡이 왔다.
그 분이 그만두고 이틀 뒤 드라이브에 접속해 공식문서를 전부 삭제해 버리셨다고
문서편집 권한을 축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드라이브에는 올해 초부터 많은 사람들이 공을 들여 만든 메뉴얼 등이 들어있었다.


다행히 백업해둔 것이 있어 큰 일은 나지 않았지만 이런저런 감상을 느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분노한 것인가 이해를 해보려고 했지만 솔직히 1도 공감 안 간다

나와 대립하던 순간 그는 단순히 그 상황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떠올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거 자신에게 고통을 주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나에게 투영했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피해의식이 폭발했을 수도 있고
갈등의 발생일로부터 두 달이 넘게 지난 뒤에 문서를 건드린 거 보면 그동안 얼마나 자주 그 일에 대해 생각하며 고통을 증폭시켰을까, 안됐다는 생각도 약간 들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부류가 나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이 경우처럼 상처를 준 상대에게 자기파괴적 복수를 하고자 하는 타잎이 있고, 혼자 아파하는 타잎이 있는 거 같다.

자기애와 열등감이 동시에 강하고 그 고통을 (단기적으로라도) 해소하기 위해 특별 대접을 바라는 타잎일수록 전자의 양상을 띄는 거 같고
후자의 경우는 창작이나 열중할 만한 취미 등 그래도 건전한 배출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듯

아무튼 생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괴롭히다 그 고통을 타인에게까지 전가해버리는 모습을 살면서 너무 많이 봤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은 단순히 개인의 이슈로 치부할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관리를 해주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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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문서가 전부 지워진 것은 아니고, 드라이브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로 지우신 것 같다는 다른 분의 의견이 있었음. 하지만 별개로 몇 달에 걸쳐 위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신 것은 사실이라 증상이 심각한 것은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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