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지나의 추억

유 진 정 2022. 11. 28. 01:33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전 호주의 모 지역에서 브로콜리 농사를 짓던 때 있었던 일이다.

아시안이라고는 나 하나뿐인 깡촌이었는데, 어느날 일하던 농장에 지나가 등장했다.

아몬드 같은 땅딸한 체형에 양갈래 머리를 한 삼십대 초반의 한국여자였다.

나는 당시 워홀 막바지 귀국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그동안 국적과 언어를 공유한다고 해서 친밀감을 느끼게 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학습한 상태라 딱히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다.
(그리고 호주에서 만난 양갈래 머리를 한 삼십대 여자는 모두 사이코였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나는 지나가 불편해졌다.
말이 너무 많았고 말의 대부분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지루한 장광설로 점철되어 있었다.
지나는 한국이 정말 싫고, 호주에서 살 작정으로 떠나온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밤에 소변을 본다는 것과 사용하는 요강에 대한 설명을 할 때쯤 나는 달아나고 싶어졌다.


며칠 뒤 묵고 있던 숙소에 Y언니가 도착했다.
자세가 곧은 미인이었다. 모 발레단의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가세가 기운 뒤 호주로 왔다고 했다.

우리가 좀 친해진 후 언니는 숙소에 한국여자가 있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일까봐 걱정했는데,
유진이 네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참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언니는 시드니에 오래 있었는데 그때 교민들 상대하며 경증의 코리안포비아에 걸린 상태였다.
하루는 홈스테이 주인이 반강제로 선을 보게 했는데 왕추남에 성격까지 이상한 중년의 남자가 나왔다고 한다.
영주권자라며 잘 해보라던 홈스테이 주인이 포주처럼 보였다고

우리는 간장과 칠리파우더를 섞어 제육볶음을 해먹고 호주에서 만난 미친 교민들 욕을 하며 가까워졌다.
농장일 안 힘드냐는 나의 질문에 언니는 내가 발레전공했잖아 다 근육이라 하나도 안 힘들어, 라며 웃었다.
그리고 산책 중 만나는 모든 동물들에게 다 말을 걸었다.


숙소에서 Y언니와 소녀소녀한 시간을 보내고 농장에 출근해서는 지나의 밉상을 지켜봐야했다.
지나를 만나 본 Y언니의 평가는 좀 남이 말할 때 듣고 있는게 아니라 자기 말할 차례만 기다리고 있는 거 같아, 였다.

지나는 백인들 앞에서만 호들갑스러운 밝음을 연기하고 부정적인 말들은 한국말로만 했다.
일도 못 했다. 팀으로 하는 일이라 한 사람이 뒤쳐지면 그 옆 사람 일이 그만큼 늘어나는 식이었는데,
늘 어디가 아프고 저기가 아프다며 나의 일거리를 늘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의 존재 자체가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징징거릴 준비가 된 그녀의 팔자 눈썹을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말을 최대한 안 섞기로 결정했다.

내가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지나가 눈치챌 무렵, 컨츄렉터를 통해 농장에 수십명의 한국인들이 유입되었다.
농장주는 지나에게 한국인 팀의 매니저 및 통역 포지션을 맡겼고, 나는 원래 일하던 팀에 남았다.
얼굴 마주칠 일이 줄어들어 좋았다.

한국인 팀은 열심히 일했고 좋은 인상을 받은 농장주가 직원들이 시티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버스를 대절해 주었다.

하루는 나와 친하게 지내던 C라는 친구가 버스자리가 남으니 너도 신청서에 이름을 적으라고 했고,
이름을 적어내자 그날 저녁 지나에게 전화가 왔다.

첫마디는 ' 야 넌 안돼, ' 였다.
그래서 왜요? 라고 묻자 그때부터는 상당히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어린게 너무 싸가지가 없다, 귀국할 거라더니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가 버려라, 그리고 너는 니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본데 넌 어차피 한국인이야!!! '
라며 소리를 마구 지르길래 깜짝 놀랐다. 자신을 거부한게 그렇게까지 화가날 일이란 말인가?

아무튼 나도 예상밖의 반응에 화가났기 때문에
'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해야 대접을 해줄게 아니냐, 한국인 운운은 뭔 소린지 모르겠고 나는 알아서 돌아갈테니 참견말라 '
라고 하자 지나는 그야말로 대폭발을 했다.

이야아아~~~!!! 라는 괴성을 들으며 전화를 끊었고 그런 나를 C가 이게 뭔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농장주가 숙소로 찾아왔다.
지나가 울며 찾아와 유진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으며, 걔가 이 농장에서 일하는 걸 하루라도 견딜 수 없다고 호소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지금 한국인 팀 매니저가 꼭 필요하고, 너는 어차피 며칠 뒤 떠날 것이니 일을 며칠 먼저 그만둬 주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대신 주급을 바로 정산해 주겠다길래 제안을 승낙했고, 지나가 정말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지나 생각이 난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고향에서 안 좋은 일 겪고 새출발하겠다고 온 자아가 불안정한 여자다.
예민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에 대한 나의 혐오를 감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말다툼을 하기 전까지 지나가 나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끼친 적은 없다.
그러니까 결국 불안정한 인간에 대한 나의 혐오가 기폭제가 되어 빚어낸 해프닝인 것이다.

Y언니의 사랑스럽던 캐릭터가 멋진 외모 좋은 기억 등으로 구축되어진 것처럼 지나에게도 개인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도 지나랑 단둘이 일을 해야 한다면 짜증날 것 같다.
지나의 상처처럼 나 역시 이런 분노의 패턴이 긴 시간에 걸쳐 새겨진 상태임으로

이런 마음을 잘 다루어서 남과 나에게 전가하는 고통의 양을 줄여나가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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