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요

고운 마음씨

유 진 정 2023. 3. 7. 02:40

 
일전에 H씨네 집에서 술을 먹는데(나는콜라)
C씨가 자기 핸드폰에 있는 친구들의 학부 때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꽤 방대한 양의 아카이빙이길래 내가 쥐고 보고 싶어서 폰을 달라고 하고 스와이핑을 막 하다가

누드 있는 거 아니에요? ㅋㅋ 이라는 말을 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학생시절 친구의 카메라를 뒤지다 친구 여친의 누드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카메라를 넘긴 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안돼에에에에 이런 슬로우 모션 느낌으로
나에게서 카메라를 강탈하려 덤볐지만 나는 사진을 이미 모두 보았다.
야하다기보다 어린애 둘이 장난하듯이 찍은 누드사진들이라 걍 웃겼고 친구를 놀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누드 있는거 아녜요 ㅋㅋ이라고 하면서 스와이핑을 하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조용히 앉아서 술먹고 있던 H씨가 갑자기 크왕캬아옹!!!!!!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내손에서 폰을 강제로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화면을 꺼버렸다.

H씨와는 존댓말을 하는 사이였고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좀 놀랐다. 
그 모습은 야만적이면서도 어쩐지 슬퍼보였기 때문에 의문점을 남겼다.

얼마 전 다시 그를 만나 그날 대체 왜 그런거냐고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이 <진짜 누드사진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라는 대답을 하길래 좀 충격을 받았다.

자기누드도 아니고 애인누드도 아닌 타인의 치부를 가려주려 그런 돌발행위를 했다는 것이 넘 신기했고
<고운 마음씨> 라는 문장이 머릿 속에 떠올랐음

최근엔 마음씨가 고운 인간들을 많이 만나는 거 같다.
그럴 때마다 감동을 받지만 스스로의 무감각함에 대해 반추하게 되어 약간 미묘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그 무감각의 원인 또한 짐작이 가기 때문에 자신을 채찍질 하게 되지는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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