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미니어처 매너티

유 진 정 2023. 3. 28. 19:09

난 당신이 좋았어

동네 하천을 산책하던 날 흔들리는 수초들을 보면서
당신은 여기에 미니어처 매너티가 떠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

헤어지고 한참 뒤 뜬금없이 그날이 떠올랐어
왜 하필 미니어처였을까가 궁금해졌는데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하천의 깊이와 넒이를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물론 내가 당신의 무의식까지 어떻게 알겠냐만은
나는 독선적인 편이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당신과 같이 먹고 자고 하는 날들도 좋았어

아무리 무의미하게 하루를 죽여도 신이나서 직장에서 돌아오는 당신을 보면
그 하루는 사실 죽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지


뻥쳐서 미안해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애초부터 없었어. 경제적 상황 나이 그거 다 핑계야.
사실대로 말하면 차일까봐 생기면 낳겠지라는 둥 매정하지 않은 여자인 척 했어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유를 말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하도록 할게


당신이 서류와 웬 검은 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던 날 그게 뭐냐고 묻는 나에게
이거? 내 스캔용 판때기. 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몇 초 뒤 뻥이고 내 00000. 라며 정체를 밝혔을땐 너무 웃겼어
그거 스캔용으로 쓰기 좋게 생기긴 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꽤나 자랑하고 싶은 판때기였을거야 
관념적인 것들보단 실존의 세계를 추구하던 당신의 자세는 언제나 내게 강력한 매력으로 다가왔지


생일선물 고마워.
내가 남자한테 받아본 것들 중에 제일 좋은 것이였어
그리고 누군가가 나도 모르던 나의 필요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점이 되게 감동적이더라고
그렇게 바쁜데 굳이굳이 올라와서 밥사주고 내려간 것도 고마웠어
나라면 선물 결제한 순간부터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아주 홀가분하게 일이나 했을텐데 

너무 좋은 말만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우리가 엄청 자주 싸우기도 했고
내가 친구들한테 흉도 지금까지 너무 많이 봐서 나쁜 말은 그때 다 한거 같아


당신은 내가 당신의 사진을 올리지 않는 이유가 이 관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불만스러워 했지만
완전히 헛짚었어
내가 쓰는 글들을 봐 보수적인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이런 데에 애인이랍시고 얼굴 공개돼서 좋을게 뭐가 있어
난 당신과 오랫동안 잘 지내고 싶었다고.
그런데 이 말이 어쩐지 입 밖으로 안 나오더라


당신은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해. 그 점이 귀엽기도 했지만
그리고 생각으로 스스로를 고문하는 경향도 있는데
이건 나의 단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요새 명상을 하는 중이야


우리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왜 그렇게 미성숙했던걸까?
역시 애착관계를 맺는 첫 상대인 가족 때문일 확률이 높겠지?
난 요즘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자주 하곤 해

가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신 가족들은 당신을 좀 심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어
솔직히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 끔찍했어
당신은 사실 섬세한 인간이니까 자신을 잘 보호했으면 좋겠어
 
미니어처 매너티의 기억이 한 번 떠오르고 나니까 자꾸 나더라
매너티의 천적은 비단구렁이이고 주식은 수초라는 것도 알게되었지

어느날 매너티 피규어를 발견했어
조형이 귀엽고 도색을 섬세하게 해서 매너티의 생생한 느낌이 잘 전달되더라고

미니어처 매너티를 당신에게 주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당신의 번호를 차단했지
내가 이런 사람이야

오늘 도파민 네이션이라는 책을 읽는데 솔직하게 말하기가 뇌에 되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길래
살면서 뭐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나 짚어보다 그놈의 매너티가 떠올랐어

그래서 한 번 써봤어
혹시 당신이 이 글을 읽더라도 절대로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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