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뒤지다 보니까 넘 주옥(?)같은 글이 많네.. 십년 전엔 이런 생각을 했군 싶음
이전 포스팅과 페어가 될 수 있는 글이라 생각되어 재업로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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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행복 - 데즈먼드 모리스
(중략)
그보다 약한 수준으로는 청교도와 요조숙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정신적 피학증이 있다.
이들에게는 행복이 자기 부정의 형태로 온다. 이들은 모든형태의 탐닉을 역겹고 사악한 것으로 보는 정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가령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느꼈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해서는 이를 피해야 한다.
섹스나 축제와 같은 주요한 쾌락은 엄격히 금지된다. 알코홀은 사람들을 너무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반드시 금해야 한다.
이것은 반쾌락주의자들의 피학적 행복이다. 보다 검소하고 절제된 금욕적인 삶을 살수록 행복은 더 커진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다른사람들은 즐거운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즐겁지 못하다면, 어떻게든 즐거울 수 없는 상태를 매력적인 유혹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 쾌락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이러한 거부 행위를 정신적인 우월함의 한 형태로 즐기기 시작한다.
(중략)
청교도적 광신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행동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고 불운이지만 보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반쾌락주자들의 극단적인 절제가 항상 자신들의 행동에만 국한되는것은 아니다.
종국에는 다른모든 사람들에게도 이를 강요하려고 시도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는 사회 전체에 유해한 간섭이 되고만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멘켄은 이런현상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했다.
"청교도의 근저에는 유일한 정직한 충동이 있으며, 그것은 행복에 대해서 우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벌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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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생한 이러한 움직임의 전형적인 예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으로,
이들은 일상적인 행복의 평범한 원천들인 음악 청취, 텔레비전 시청, 춤, 영화관람 같은 것까지 금지했다.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데서 충족감을 느끼는 면이 피상적으로 볼때 가학증과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들이 금지를 강요하는 가장 주요한 동기는 타인을 다치게 하는 데서 쾌락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향유하게 된 것과 같은 수준의 피학적 행복으로 타인을 물들이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자기 부정의 기쁨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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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담마코리아 채널에서 미니멀리즘의 극단적 추구 역시 형태만 바뀐 집착이니 중도를 추구하라는 내용의 문답이 단톡으로 온 적이 있는데 매우 공감했다.
저 피학적 청교도 케이스는 실제로 나와 같은 초보 수행자나 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상태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십년전 위의 글에 대공감한 이유는 실제로 저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으니까!!
본인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수행이라는 미명아래 흑화하고 있는 것인지 점검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로 써먹기도 좋은 내용
- 내가 절제하고 있는 행위를 즐기는 사람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 그들을 강제하고 훈계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어 오르거나 실제로 그것을 행한다
- 상대를 악으로 간주
- 내가 알고있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을 볼때 우월감에 도취된다
- 나의 신념만이 진실이며 모두를 여기에 끌어들이고 싶다. 반대자들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니까 쉬운 예를 들자면
본인이 탈코를 하는 것은 좋지만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한 여성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집착이고 여기엔 어떤 열등의식이나 사적 감정이 깃들어 있을 수 있으니 스스로의 마음을 점검해야 된다는 소리
나의 경우 특히 저 <우월감에 도취> 항목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
성취가 적고 게으른 것에 대한 열등감이 저런 형식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음
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쾌락의 추구라는 목적에 충실하게 살아온 편이라 인생을 즐기는 인간들을 볼 때 느끼는 박탈감은 적은 편인듯
부처님의 경우도 왕자라는 지위를 누리며 대부분의 행복과 쾌락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쉬우셨을 것이라 생각
예전에 불교갤에서 사실 자신은 윤회해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선업을 많이 쌓아 다음 생에 미남에 부자로 태어나 이번 생에 못 누린 것들을 누리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음
그리고 다음날 만난 도반 분에게 왜 명상 시작하셨냐고 여쭤보니 다시 태어나기 싫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오길래 흥미롭다고 생각했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꽤 여유로운 인생을 사신 분인데도 다시 태어나서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딱 싫으시다고 (물론 결핍의 결여 역시 일종의 결핍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함)
암튼 그래서 결핍이 사람을 수행의 길로 들어오게 만들 수 있지만 수행의 장애가 되기도 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음
그래도 저 불갤러는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알고있다는 점에서 피학적 청교도보다는 마음이 좋은 상태인듯
부처님은 극단적 고행 끝에 이 짓거리로는 대각을 이룰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