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 같은 인간극장이 없다

유 진 정 2024. 4. 29. 16:48

어제 1호선을 타고 좀 멀리 갔어

노량진 쯤에서 보라색 방수 돗자리가 담긴 구루마를 끌고 7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노인이 등장했어
UFC 선수들 처럼 등장과 동시에 방송이 나오더라고  

' 이동상인의 차량 판매 활동의 근절과.. 철도안전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

안내음과 동시에 노인이

' 다목적 방수 돗자리 찢어지지 않습니다! 파란색 보라색 두 가지 색 단돈 오천원에 모시겠습니다! '

를 외쳤기 때문에 두 목소리의 경합이 이루어졌지

노인은 셔츠를 빳빳하게 다려입었고 허리에는 디스크 복대를 차고 있었어  
페이즐리 패턴 셔츠 주머니에 두둑하게 꽂힌 현금이 그의 짬바를 증명하는 듯 했지 영업은 연출이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걸 누가 사 라고 나는 생각했고
그가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좌석 끝에서 끝까지 오가는 동안 주머니를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떻게 했는 줄 알아?

그냥 서 있었어
아무 말도 하지않고 전철 칸의 딱 중간에 뿌리를 박은 나무처럼 

그래서 나는 그의 눈을 바라봤는데  
허공 어느 쯤에 고정된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빛나는 갈색 눈동자와 조금 누런 흰자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어 먹이를 노리는 개구리와도 같은 긴장감

결국 그 긴장감에 굴복한 내 옆의 아주머니가 오천원을 내밀었어 고향의 아버지라도 생각이 났던 걸까
고개를 숙이고 더 낮은 곳에서 위로 손을 뻗어 지폐를 건내는 모습은 패장처럼도 구원을 바라는 죄인처럼도 보였어

무슨 색으로 하시겠어요. 
아무거나.. 보라색으로 주세요 

여기까지는 그래 좋아, 좋다고 치자

그런데 두 정거장 지나니까 또 다른 노인이 들어와

똑같은 거 팔아
근데 스킬이 딸려
마스크 썼고 눈빛도 희미해 마스크를 썼으니 목소리는 더 작아지지
이래가 어디 팔겠나.. 하나도 못 팔았어 앞주머니에 현금도 안 꼽고 다녀

열심히 중얼거리는 노인에게 나는 그거 좀 전에 다 팔고 갔어요!! 를 외치고 싶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어 그건 선 넘는 거고 나는 선 넘는 거 싫어해 

저번 달에서는 아이들 아빠가 오래 아프다 돌아가셨어요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는 할머니가 탔었지
꽤 큰 판초콜렛을 이천원인가에 팔았는데 잘 팔렸어
마음씨 좋아보이는 아줌마들이 앞 다투어 돈을 내밀었는데 나는 안 샀어 



내가 어릴 때 이런 풍경들이 너무 괴로웠어

도곡시장에 가면 다리가 없는 걸인이 있었어
다리대신에 검고 두꺼운 고무 판을 대놨어 끌려서 살이 까지지 않게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찬송가를 틀어놓고 기어다녔고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엔 동전 몇 개가 들어있었지
나는 왜 어른들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도 저 사람을 구해주지 않는 건가 너무 이상했어

하지만 그 이유를 엄마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어
나는 궁금한 건 악착같이 물어보고야 마는 귀찮은 꼬마였는데도 너무 무겁고 무서워서 물어볼 수가 없었어

이런 고통의 끝에는 항상 자기 중심적인 질문이 떠올라. 야 너 이래가지고 살 수 있겠냐? 

 

전철에서 내려 좋아하는 분을 만났어
1호선은 잡상인이 많네요, 하자 이 분이 자기는 오늘 다리 대신 고무를 끼워놓은 걸인을 봤대
마음 속을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랐고 그런 사람 아직도 있구나.. 중얼거렸더니
그럼, 있지. 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와

사실 아까 전철에서 눈을 감고 천장을 올려다 봤더니 눈물이 코로 나왔거든
그런데 이런 감정들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잖아 나한테도 그 사람들한테도  

부처님은 언제나 이익을 강조하시더라고 
자신과 남에게 손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이익이 되는 행동만 하래 

맞는 말인데 아직 어려워 그러니 계속 수행하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