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영적 수행담은 깨달음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어떨까?
대각을 한 선사가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존경받는 구루가 주차 문제로 시비가 생긴다면 어떨까?
대형 쇼핑몰을 헤매는 신비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깨달음 이후의 삶은 어떠할까?
영적 깨달음과 일상의 빨랫감,
이 양쪽을 포용하는 지혜가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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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위빠사나 명상가이자 작가인 잭 콘필드가 쓴 <깨달음 이후의 빨랫감>을 읽고 있습니다
10일 코스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간 모인 빨래들을 세탁기에 집어넣는 것이고
그때마다 아 복잡한 속세로 돌아왔구나, 를 느끼며 이 과정이 어떤 리추얼 같다고 생각해 왔는데요
그런 의미에서도 와닿은 제목이었습니다. 어제 읽은 챕터가 감동적이길래 공유합니다
찬양이나 비난에 초연하기
도가에서는 선을 만들면 동시에 악도 만들어지며,
옳음을 만들면 그름도 만들어진다고 가르친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대신 '지친 영혼을 쉬게함'이 어떤가?
이것이 도의 자유로움이다.
세상을 더 낫게 바꾸고 싶은가?
글쎄, 가능할까?
세상 일에 참견하면 일을 그르치고,
그것을 대상으로 대하면 손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도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나니, 바꿔놓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제 갈 길을 가게 하고 그 돌아가는 중심에 머문다.
일상 속에서 완전성을 간파하는 마음에게는 찬양과 비난, 성공과 실패, 자만과 자기 비하는 우리의 경험을 흐려놓는 엉터리 훈수이자 훼방꾼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마침내 찬양과 비난 너머로 발을 디디면 거기에서 깊은 안도를 느낀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가슴과 행동의 자유 속에서 많은 일들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해방의 한 본보기가 있다.
의사가 없는 인도의 벽지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아이들을 의과 대학에 보내면서 나중에 의사가 되어 마을로 돌아오게 한다.
산간의 가난한 마을 의사의 진료실 앞에는 ' 캘커타 의대 의학 박사 낙방, V. S. 크리슈나' 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이것은 크리슈나 의사는 캘커타 의대를 다녔지만 자격 시험에 떨어졌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진료실을 열고, 자신이 학위가 없음을 떳떳이 밝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의 의학 지식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진료실은 꽤 붐볐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의사 크리슈나와 같은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에는 수많은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신을 수치심이나 자만에 사로잡혀 있게 버려둔다면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적 지도자들이, 찬양과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오직 이 순간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훈련을 함에 따라 몇 시간에서 점차 여러 날 동안에도 타인과 자기 자신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심판이 일어나고 사라지도록 그대로 내버려둘 뿐 그 속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배운다.
우리는 삶이 생각하던 것보다 얼마나 더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는다.
삶이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비판적인 생각을 버리고 삶의 춤사위를 그저 경험할 때, 휴식과 자유가 찾아온다.
어떤 사람이 가구 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존스 씨,
당신이 아직 대금을 완불하지 못한 가구들을 회수하러 트럭을 보낸다면 당신의 이웃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받았다.
그 문제를 저의 이웃들에게 물어봤더니 그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런 행동은 인색한 회사가 벌이는 비열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고요.
찬양과 비난을 초월하여 산다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흔여섯 살인 루스 데니슨Ruth Denison은 서양에서 가장 존경받는 비파사나 지도자들 중에 한 사람이다.
역시 평생 비파사나를 수행해 왔던 그녀의 남편이 최근에 치매에 걸려서 집 밖을 배회하다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루스는 여러 달 동안 비파사나 센터와 집 사이를 네 시간 동안 운전해서 오가면서 그를 돌보느라 밤을 새우곤 했다.
하루는 그가 스토브를 돌보지 않고 내버려둬서 집에 불이 난 적도 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녀는 강연과 수련회를 위해 오리건의 포틀랜드로 초청을 받았다.
진이 빠져서 도착한 그녀는 150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강연장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먼저 학생들에게 현재의 경험을 직접 인식하기 위해 각자의 몸과 호흡을 느껴보게 했다.
그녀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깨어서 바라보는 법에 대해 강연을 했다.
그리고 남편의 치매와 최근에 있었던 화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깨어서 인식하기에 대한 강연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그녀는 말했다. "제 남편과 화재에 대해 이야기했던가요?"
그러고는 같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반복했다.
그녀는 다시 주의 깊게 바라보기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다가는 또,
"오, 제 남편의 일과 화재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네요"
하고는 세 번째로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도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이 여인에 대해 걱정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몇 사람은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문으로 가기 전에 루스가 소리쳤다.
"잠깐만! 명상 수행자인 당신들, 어디로 가려고 해요?
당신들은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여기에 오셨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했나요?"
그들은 그 자리에 멈춘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밤에는 여러분들이 뭔가 특별한 것을 관찰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오래된 비파사나 지도자가 실수하는 광경을 말입니다. 난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른답니다."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루스는 강연을 이어갔다.
"여러분은 어떤 일이 일어 나더라도 그것에 대해 깨어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수행입니다."
다행히도 루스의 기억 상실증은 오직 피로로 인해 그날 밤에만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휴식을 취하자마자 왕성한 기억력과 에너지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밤 진정한 임재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 어떤 일과도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 말이다 - 그것이 심지어 자신의 방향감각 상실일지라도.
그리고 깨어있음으로써 그것을 자비심 안에 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