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자리 아주머니들이 2시 20분에 일어나 짐을 싸길래 덩달아 깨버렸다.
명상 한시간, 눈감고 한시간 누워 있다가 주방으로 향했다.
대령님 주도 하에 간단한 브리핑
깐돌(나)님이 선두에 서고
무릎이 아픈 대표님이 두번째 (알고보니 부상으로 연골이 거의 없으시다고)
박사님1,2가 세번째
맨 후방은 대령님이 맡아서 오르기로
남은 재료를 탈탈 털어 강력한 커피를 끓였다.
대표님이 지고 올라오신 거대하고 무거운 보온병에 넣어 천왕봉에서 마시기로
헤드랜턴을 키고 오전 5시쯤 천왕봉을 향한 발걸음을 옮긴다.
배낭 없이 오르니까 날아갈 거 같음
중간에 속도 너무 느린가요? 하고 물어봤는데 표정들이 안 좋으시길래 그때부턴 정말 천천히 걸음
아 그리고 배터리 점검을 안 하고 왔더니 랜턴 불빛이 점점 흐려진다.
뒤에오는 대표님의 초강력 손전등 빛에 의지해 걸었다. 혼자 올라왔으면 난처했을 뻔
밝아오는 여명
근두운 주차장
혼자 온 저 분은 저 위치에서 사진을 몇 장 찍더니 천왕봉 안 찍고 바로 하산. 마이웨이로 사는 사람 같아서 좀 멋있었음
6시 15분 천왕봉 도착.
조금 기다리니 운해 위로 해가 쏘옥 떠오르기 시작
떠올랐을 때는 사진 찍기 싫어서 눈으로 봤다. 어차피 천왕봉 일출 검색하면 사진 수천장 나오고..
사람들의 나직한 탄성과 함께 펼쳐지는 아침해의 무대는 감동적이었다.
일출의 감동에 휩싸인 대퓨님이 갑자기 태극기를 꺼내 휘두름
그 모습을 본 경상도 여사님들도 국기를 빌려감
사람들이 모두 하산한 뒤 구름 속으로 들락날락하는 해를 감상하며 커피와 과자를 먹었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주모~~~
무산소, 아니 무연골 등정을 감축드립니다.
내려가면서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
저 뒤의 모자 쓴 청년이 우리에게 천왕봉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봤고
대령님이 음, 33분 22초 걸립니다, 라는 하이개그를 치자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청년이 뒤를 돌아 대령님을 쳐다보더니 어! 를 외쳤다.
알고보니 현직 계실 때 복무하던 기술장교시라고. 지리산에선 별 일이 다 일어나는군
장터목에 도착해 건조국을 꺼내는데
먼저 내려와 있던 경상도 여사님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와 두 손에 올리신 폰을 말없이 내민다.
그 이유는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보여주시려고ㅋㅋㅋ 아니 근데 진짜 잘 나왔잖아!
뜨거운 오뎅탕도 나눠 주셨다. 우리 미역국에 북어/계란 블럭도 두 개나 넣어주시고..
저번 종주 때도 느낀건데 지리산의 매력 중 하나는 행복한 상태의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산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도 같은게
장거리 산행 -> 도파민 엔돌핀 다 팍팍 나와있는 상태
열악한 환경 -> 서로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입
아름다운 자연 -> 감동으로 마음이 여유로워짐
그리고 여기까지 올라올 정도면 대체로 건강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는 소리이기도 하고..
국을 한참 끓이고 있으니 뒤에서 천천히 내려오던 무연골 대표님 도착
' 달달커피 먹고 싶어 달달커피, '
' 커피 아까 다 먹었어 '
' 달달 커피~~~달달커피~~~~!!!!! '
원성 끝에 대령님이 경상도 여사님들한테 구걸을 하고 믹스커피를 여섯 개나 얻어오셨다.
달달커피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치고 천왕봉 팀원들과 통성명을 한 뒤
작별인사를 나누고 먼저 하산했다.
쭉 내려와 홈바위교를 지나면 돌탑 무더기가 등장
큰실베짱이가 돌탑의 캡스톤이 되어주었다.
베짱이 너머에는 무자치가 뙇
폭포 소리 들으며 남은 행동식 해치움
쉬며 걸으며 하다보니 천왕봉 팀이랑은 계속 만났다 헤어졌다.. 작별인사를 한 의미가 없군ㅎㅎ
거의 다 내려왔는데 먼저 걷던 등산객이 엇! 하더니 허리를 굽힌다.
큰 뱀이 꼬리를 파르르 흔들며 빠르게 지나감
뱀의 정체는 까치 살모사
매우 강력한 독사로 예전엔 물리면 일곱 걸음을 못 걸어 죽는다는 말도 있었다 하니 조심
너무 깨끗한 계곡 너무 들어가고 싶어
아무리 타올로 닦아놔도 팔을 핥아보면 짜다
너덜너덜
중산리 주차장까지는 넓은 포장도로로 내려갈 수도,
데크로 조성된 생태탐방로를 걸을 수도 있다. 탐방로로 걷는다.
탐방로에는 계단이 좀 있다. 손잡이를 잡고 계단을 거꾸로 내려가면 다리가 안 아프다는 사실을 발견
카페 근처까지 오니 반가운 플래카드가 등장.
' 여기서 150M까지 한시적 계곡 출입을 허용합니다 '
입수!!!!!!!!!!!!
잠수 몇 번 하고 큰 바위 뒤에 숨어 옷을 갈아입고 나니 다시 태어난 기분. 쾌~적~
용마저도 걷게 만드는 지리산
주자창 도착.
이 조형의 작품명은 한미수교라고 내가 지었음
버스 티켓머신 옆에 식당이 있고 큰 길로 먼저 와 계시던 대령님팀이 거기서 파전에 밤막걸리를 드시고 계셨다.
젓가락을 들라길래 사양없이 앉는다. 박사님 내외도 곧 도착해서 합석
종주 끝에 마시는 콜라는 정말 미친 맛이었다. 제로 말고 꼭 설탕 들어간 걸로 먹어야됨
먹다보니 버스 출발 5분 전이길래 서둘러 타는데 기사님이 재촉을 어찌나 하는지 속세로 돌아온 실감이 난다.
짐칸에 배낭 집어넣고 있는데 당장 올라타라고 하도 다그쳐서 스틱을 들고 탔더니
스틱도 짐칸에 넣어야 된다며 성화 성화~ 이것은 인간을 반항적으로 만드는 이중메시지!
" 아니 당장 올라타라 하셔서 제가 지금 들고 탄거자나욧!! "
" 그러니까 미리미리 탔어야지!! 식당에는 왜 들어가 가지고!! "
옥신각신을 좀 하고 버스는 정각에 칼같이 출발했다.
걸음을 떼지 않는데도 이동이 가능하다니 문명이란 이 얼마나 놀라운가!
중간중간에 노인분들이 타시는데 승객과 운전자의 관계가 끈끈하다.
분홍색 장화에 빨간색 바지를 입고 꽃무늬 장바구니를 든 할머니가 버스를 보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든다.
이 지역 노인들에게 버스는 소중한 이동수단일 것이다.
할머니는 내 옆에 앉더니 산에 다녀오는 거냐고 물었다. 천왕봉 사진을 몇 장 보여드렸다.
할머니와 기사님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뒤에 앉은 영감님이 갑자기
" 난 쌀 10키로 2500원에 산다! 극빈계층이라!!! "
하며 빈밍아웃을 하신다. 그때부터 대화가 웃기게 흘러갔다.
기사님도 할머니도 영감님도 다 자기 하고싶은 말만 하길래 나도 하고싶은 말만 함
대화 중 좋은 기사의 자질과 승객으로써의 소양에 대한 주제가 등장했는데
" 버스 출발했는데 자리 바꾼다고 일어나면 공구라져삐! 팔 뿔라져삐!! "
하는 빡센 방언이 나오길래 설명을 요구했다. 대충 자빠지고 구른다는 뜻인 듯
고속버스표를 예약했는데 이 버스가 도착하는 시외버스터미널에도 서울 가는 버스가 많다고 한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고속버스 터미널 까지 걸어갈 수 있어요? 물으니 멀다, 2km쯤 되니 택시를 타라고.
그러자 빈밍아웃 영감님이 다시 외친다.
" 걸어갈 수 있지! 난 서울까지도 걸어갔는데! "
" 얼마나 걸려요? "
" 보름! "
" 그게 언제에요? "
" 1962년!! "
" 보름 동안 어디서 자요? "
" 시 쓰고 노래 불러주고 얻어먹고 얻어잤지! "
등산하는 동안 쓰레기를 볼 때마다 거슬렸는데
사실 산의 면적에 비하면 쓰레기는 정말정말 조금만 있었다.
버리는 사람보다 안 버리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이다.
그런데도 눈에 띄니 쓰레기가 많다고 착각하게 되고 거슬려한다.
인간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서로 돕고 싶어하는 선량한 사람들인데
뉴스나 웹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해 들으면 역시 좆간! 하며 착각을 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의 배려.
고속버스 티켓 취소하고 4시 시외버스 표를 끊었다.
서초 터미널에 도착해 순대실록 입갤
깍두기 맛의 풍부함에 감동받음
화장실 명언도 너무 문학적
10시쯤 집에 도착해 샤워/빨래/띵상하고 잤다.
지리산 또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