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의 날

유 진 정 2025. 12. 24. 17:07

예수님 생신이 다가왔다. 생일에 대해 적어본다.

꽤 오랜기간 동안 생일만 다가오면 기분이 별로였다.
태어난게 과연 축하할 일인지도 모르겠고 한 걸음 더 죽음에 가까워 졌다는 사실을 공증받는 날 같기도 하고 
만날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루저처럼 느껴지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 날이 다가오면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 무능한, 자신의 뾰족함을 돌아보게 되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구렸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생일 = 중요하지 않은 날 이라는 policy를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오래 전 만나던 남자친구는 내 생일마다 자신의 일정을 만들었고 지금보다 더 둔감했던 때라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서로에 대한 집착으로 점철되었던 관계라 꽤나 난리를 치루며 헤어졌는데
그 와중 그와 통화하던 부친의 '어떻게 몇 년을 만나면서 생일 한 번을 안 챙겨주나 이 사람아..' 라고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몇년 전 캘리포니아 연구회에서 뭔 얘기하다 이 에피소드를 언급했는데
공감능력 떨어진다고 맨날 욕먹는 대문자T 여성들이 갑자기 엄청나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생일날 축하를 마구 해주길래 깜짝 놀랐고 솔직히 기뻤다. 축하받는 것은 기쁜 일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 해에 도반들이 작게 파티도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도 아주 기뻤고
그래서 나도 남의 생일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당신의 존재로 인해 내가 기쁩니다.라는 뜻인 거 같다. 

아무튼 이렇게 생일에 대한 나의 결핍은 해소되었고 그러고 나니까 다시 생일이 귀찮아졌다. 
예전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귀찮아했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귀찮다.

지금까지 수억번은 태어나고 죽었을 텐데 태어난 날을 기린다는게 일단 웃기고
이번 생의 만남이 반가운 사람들 많지만 좀 너무 많은 감이 있다. 나눌 감정이 있으면 평소에 그냥 나누면 되는 거 같다. 

그래서 든 생각인데 <생일의 날 birthday day> 라는 명절을 하루 제창해서 서로의 존재를 기뻐하는 것으로
한 해 동안 할 축하를 퉁치면 좋지 않을까?

사랑의 예수님이 태어나신 크리스마스도 그런 역할을 하기 좋은 날이지 않을까 싶다.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덜 미워하고 더 사랑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