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 속의 프리즘

유 진 정 2025. 12. 31. 18:44

 

어떤 이에게 채찍질은 징벌이고 어떤 이에게는 포상이다.
어떤 이에게 원전은 종말의 씨앗이고 어떤 이에게는 기후윤리의 최후 카드다.

같은 것을 보아도 해석은 모두 다르게 내린다.

이런 광경을 목도할 때 머릿 속에 하나씩 들어있는 프리즘을 상상한다. 
외부자극이라는 빛이 우리 안에 닿는 즉시 프리즘이 그것을 굴절시킨다.
어떤 파장은 강조되고 어떤 파장은 사라진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스템에 의해 주입된 정보, 교육, 경험 등에 의해 프리즘의 형태는 제각각으로 깎여나간다. 
프리즘은 정체성, 가치관, EGO 등으로 명명되며 정의와 상식이라는 명목으로 은폐되기도 한다.

상식 = 절대적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식이 비슷한 사람과 교류하게 되는 이유는
바쁜 뇌가 커뮤니케이션에 너무 큰 비용을 치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생에 걸쳐 건설해온 반응과 사고의 구조, 즉 를 해체하는 작업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프리즘의 형태가 지나치게 다르면
예를 들어 대립되는 종교적, 정치적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동일한 아젠다를 다룰 때는 이로 인해 충돌이 일어나기 쉽다. 
내 눈에는 분명 빨간색으로 보이는 것을 상대는 파란색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프리즘이 없는 상황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
빛의 왜곡은 오작동이라기보다 각각의 개성을 지닌 개체의 생존과 적응을 위해 진화한 기본 설계에 가까운 것이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지점은 프리즘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프리즘의 존재를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인식의 부재이다.

나는 객관적으로 보고있다, 나의 정의가 곧 선이며 나는 틀리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서로의 좌절감이 발생되고 그것은 다시 감정적 격발로 환원되며
수많은 프리즘들이 겹쳐지다 보면 전쟁이라는 고비용의 재난마저 발생한다. 

수행은 프리즘을 부수거나 빛을 꺼버리는 것이 아닌, 프리즘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드는 연습이라고 느끼고 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표면적 차원에서의 카리스마를 훼손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