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세계

바르게 있기보다는 존재 자체로 있으라 - 람 다스

유 진 정 2025. 12. 31. 22:00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지켜보라.

판단은 부분적으로는 당신 자신의 두려움에서 나온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편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우리는 판단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관련하여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된다.
판단하는 마음은 매우 분열적이다. 그것은 나와 너를 분리시킨다. 분리감은 우리의 가슴을 닫아 버린다.

(중략)

이 마을에서의 유일한 게임은 존재의 게임이다. 이 게임에는 존재의 최고점과 최저점이 모두 포함된다.
당신이 무언가를 밀어낼 때마다, 그 무언가는 거기에 잔류한다. 양탄자 아래로 더미가 매우 커지게 된다.
당신은 자신의 최고점보다는 최저점에 훨씬 더 관심을 쏟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에게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지 "가르침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할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뿐이다.

누군가 당신의 분노를 자극할 때, 당신이 화를 내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그것은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사고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한다.
당신 자신의 지옥을 만드는 것은, 당신 자신의 기대인 것이다.
어떤 일이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좌절할 때에는, 당신을 좌절시키는 대상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고방식 또한 돌아보아야 한다.

당신의 감정적 고통의 많은 부분은, 우주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당신이 생각으로 창조한 모델들과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지 못하는 당신의 사고 습관이 만들어내는 합작품이다.

마하라지는 나에게 모두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모두를 사랑하라,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모두가 하나이다.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라. 모든 곳에서 신을 보라. 그냥 모든 것을 다 사랑하라. 화내지 말라. 

람 다스, 화를 내지 마. 모두를 사랑하고, 진실을 말해. 모두를 사랑하고, 화내지 마.”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당신은 “그래, 그래, 맞아. 지당한 말씀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말은 어렸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고 말 것이다.


나는 2년 동안 서양에서 성자로서 행세하고는 인도로 막 돌아온 터였다.
정욕과 욕심과 게으름이 여전히 가득했던 나에게는 미국 생활이 너무나 힘들었다.

아직 먹어야 할 피자가 너무 많았고, 누군가가 항상 지켜보고 있는 상태에서 피자를 몰래 먹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침내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까지 동굴에 숨어 있기를 바라면서 인도로 다시 도망쳤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가는 곳마다 나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서양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 모두가 서서히 싫어졌다. 내가 무슨 수로 40명의 서양인들과 함께 동굴에 들어가 거룩해질 수 있겠는가?

일 년 동안에 단 2주를 제외하고는, 나는 인도 한복판에서 서양식 사고방식에 완전히 젖어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마하라지와 함께 있었고, 마침내 나는 이렇게 결정했다.

 “그래, 그는 언제나 진실만 말하고 화를 내지 않지. 하지만 나는 늘 화가 나 있어. 그것이 진실이야.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어. 마음속은 화가 부글부글 끓고 있으면서.

아, 이 위선 덩어리, 정말 미치겠군,미치겠어. 마하라지는 진실을 말하라고 했지. 
화를 내지 않고 진실만 말하는 이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어찌 됐든 난 진실만 말하는 이 한 가지만 해야겠어.”

사람들이 여전히 내 방으로 찾아오곤 했고, 그들은 분명 사랑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 게으름뱅이 자식아, 이 방에서 꺼져. 당신은 너무 멋져 보여. 하지만 이젠 그런 당신이 메스꺼워. 구역질이 난다고.” 

머지않아 나는 그룹 전체와 따로 놀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런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나는 집요했다.
그 당시 나는 돈을 만지지 않는 수행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날마다 시내에서 아쉬람으로 가기 위해 버스나 택시를 함께 탔고, 누군가가 돈을 냈다.

하지만 나는 모두에게 너무 화가 나서, 버스를 타고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이 걸리는 아쉬람까지 걸어서 갔다.

어느 날 나는 늦게 도착했고, 너무 화가 나 있었다. 
모두가 안뜰에서 마하라지의 맞은편에 앉아 마하라지가 축복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잎사귀에 담긴 음식이 내 몫으로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내가 특별히 더 분노하는 대상들 중 한 명이 음식을 가져오더니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것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마하라지가 나를 불렀다. “람 다스, 왜 그래? 뭐 때문이지?”

“예. 저는 아달마(adharma: 법에 어긋남)를 참을 수 없습니다. 더러워요, 더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을 참을 수 없고, 나 자신을 참을 수 없어요. 나는 당신만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싫어요.”

그 시점에서 나는 통곡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 안의 모든 분노를 다 쏟아내듯이 울고 또 울었다.

마하라지가 우유를 좀 가져오라고 하더니, 나에게 우유를 먹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내 수염을 잡아당겼다.
그도 나와 함께 울었다. 그러고는 나를 보더니 “모두를 사랑하고, 화내지 마.”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글쎄요, 당신은 나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하셨고, 진실은 내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바짝 다가와 코와 코, 눈과 눈을 맞대고는 거칠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해.”

“하지만...” 하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 마하라지가 말하려고 하는 참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자명해졌다. 

“넌 네가 생각하는 네가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너이기를 그칠 때, 너는 비로소 참다운 너일 수 있어.” 

나는 내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글쎄, 네가 생각하는 너이기를 포기할 때에도, 너의 참자아는 그대로 여기에 있어. 게임은 너무 간단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해.”

나는 서양인 무리를 넘겨다보았다. 
나는 나의 분노의 대상이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고, 이제는 그들 안에서 내가 사랑할 만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서 밥을 먹어.”라고 말했다. 나는 가서 먹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는 모두를 가까이 불러 말했다. “람 다스는 위대한 성자다. 가서 그의 발을 만져라.”

그것은 나를 완전히 미칠 정도로 화나게 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보통 서로 이야기를 하여 잘못을 사과하고 양해하여 서로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그래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좋네요...” 

문제는 그가 내 체면을 살려줘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체면 따위는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화났던 유일한 이유는, 마땅히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사과를 쪼개서 들고 돌아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나누어주었다. 

화를 내며 음식을 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독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내가 분노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사과 한 조각도 먹게 해서는 안 되었다. 
분노의 진동이 음식과 함께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치유는 그 반대이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바라보았고, 내가 화를 낸 대상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자 분노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점에서, 나는 우리 사이에 남은 것은 내 자존심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단지 나의 옳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냥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나의 구루, 나 자신, 그들의 영혼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냥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마다의 개인적인 차이는 그냥 내려놓아야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그런 가르침을 받고 나면, 과연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게 될까? 아니다. 나는 여전히 화가 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화가 나기 시작하면, 나는 내가 궁지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가 나의 기대와 나의 의로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략)


당신이 사회적 책임감을 느낀다면,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이다. 
평화로운 우주에서 살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스스로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평화의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는 속으로 화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는가? 사회적 행동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이야기한다. 

의로움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의에 굶주려 죽게 만든다. 

의롭기보다 자유롭기를 더 원한다면, 당신은 의로움, 옳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뱃사공이 안개 속에서 배를 저어가다가 다른 배와 부딪힌다. 
그는 다른 뱃사공에게 욕을 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그래? 눈은 뭐하러 달고 다녀?” 
잠시 후 안개가 걷히고 나자, 그는 다른 배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빈 배였던 것이다.

옳음이란 대략 이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은 아버지가 밉다. 그래서 당신 마음속의 아버지를 향해 별별 말을 다 하고, 욕까지 퍼붓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없다. 심리적으로 당신은 그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당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동일시하지만, 그 모든 것이 생각의 다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당신의 심리적 아버지는 공허한 현상의 또 다른 세트일 뿐이다. 

그러한 심리적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을 용서해요, 나는 당신을 용서해요.”라고 열심히 말해 봐도, 
그것은 시계를 향해 “나는 당신을 용서해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이야기 속의 뱃사공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서둘 필요가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 오래 옳은 사람으로서 살도록 하라.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옳다는 것이 실제로는 매우 제약이 많고 사는 재미가 별로 없는 뻑뻑한 작은 상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의로움은 당신을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차단시킨다. 
내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상황에 갇혀 있을 때, 그것은 그들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행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판단에 휘말리면,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일이 된다.

(중략)

우리의 곤경은, 우리가 얼마나 옳은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 옳다고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존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됨됨이를 배제한 채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모델에 감정적으로 집착하게 된다면,
당신의 입장에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감정적 반응에 길을 잃는 것은, 당신이 있기를 원하는 자리가 아니다. 
당신의 인간성과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 이것이 공감과 긍휼의 시작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육화되어 존재한다. 여기에서 탈출할 길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밖으로 걸어 나갈 수가 없다. 다르마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다른 인간 존재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이기도 하다.

람 다스
닦으면, 스스로 빛난다 124- 13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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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고백하자면
저 <닦으면, 스스로 빛난다> 라는 번안센스에도 화가난다. 특히 저 쉼표가 개열받음 
세상에서, 네가 제일 예쁘다, 같은 공원에 있는 영혼없는 짜치는 하트모양 구조물 뭐 그딴 거 생각난다고

람다스의 존재 자체도 열받던 때가 있었고 ahhh same hippie shit 이라며 그의 책을 들여다 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그래서 이 챕터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가슴을 후벼판다. 읽는 동안 거의 오열함 

블로그 하면서 알게 된 건데 쓰는 사람이 울면서 쓰면 읽는 사람도 운다. 그 양자 어쩌구 진동 그런게 전달되는듯..

아무튼 그래서 람다스는 책 쓰면서 많이 울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상을 보고 확신했음 딱 저렇게 울게 된다고

 

중요한 건 아니지만 동지 전날 밤부터 그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알고보니 이번 동지가 기일이셨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rest in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