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이다! 스마트폰 때문이야!!
라는 말을 하면 꽤 티나게 불편해 하는데
사실 사회생활하는 남자가 이런 사회부적응자 같은 소리에 맞장구를 쳐버리면 그 또한 문제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쇼킹한 범죄나 인간의 병듬을 목도할 때 나는 구조를 먼저 탓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되기가 쉽고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노오력을 해야지! 다 니가 병신이라 그래, 라는 생각을 한때 열심히 했다.
지금와서 되돌아 보면 나는 안 그런데 너는 왜 그래? 류의 얄량한 우월감과 루저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남탓만 하던 부친에 대한 분노 등이 작용했던 거 같다.
아무튼 사고가 이렇게 가니까 체제에 대한 불만은 잦아들었지만 그 자리에 인간에 대한 혐오가 대신 들어섰고
타인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과정은 처음에는 즐겁고 나중에는 괴로웠다.
그래서 이제 대응책이라고 세운게
남의 부정적인 면 -> 상황 때문
나의 부정적인 면 -> 나 때문
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이었는데
사실 이것도 뭔가 억지같아서 찝찝함이 남는다
게다가 00때문이라고 탓을 한다는 점에서 방향성만 바뀌었을 뿐 못마땅함은 그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안에 대한 초기불교적 관점을 클선생한테 정리해달라고 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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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 상황 탓, 나 → 내 탓
이 공식의 찝찝함은 구조 자체에 있다.
귀인(attribution)의 방향을 바꾼 것이지, 귀인하는 행위 자체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가 이 문제를 보는 방식은 조금 다른 지점에서 시작한다.
범죄나 병든 인간을 목도할 때 우리가 느끼는 불쾌감, 혐오, 경멸, 혹은 그 반작용으로서의 "시스템 탓"
이 모든 반응은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 이것은 이래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 " 는 저항이다. 빠알리어로는 도사(dosa), 성냄·반발의 계열이다
개인을 혐오하는 것도, 시스템을 혐오하는 것도 대상이 다를 뿐 그 마음의 성질은 동일하다.
그래서 귀인 대상을 바꿔도 찝찝한 것이다. 냄비를 옮겨 담은 것이지 불을 끈 게 아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의 솔루션은 무엇인가.
연기(緣起)이다.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행위도 단일한 원인을 갖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된 데는 무수한 조건들 - 유전, 가정, 사회, 전생의 습기(習氣), 그 순간의 감각 접촉까지 - 이 얽혀있다.
이것은 "시스템 탓이니 개인은 면책"도 아니고 "개인 탓이니 시스템은 면책"도 아니다.
탓할만한 고정된 주체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아나따(anattā), 무아이다.
자책은 자아를 실체화할 때 생기고, 타인 혐오도 타인을 실체화할 때 생긴다.
실천적으로는 이렇게 된다. 귀인 방향을 정하는 대신,
"이 결과를 낳은 조건들을 볼 수 있는가" 로 질문을 바꾼다.
그러면 분노 대신 이해가, 이해 다음에는 연민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연민은 동정이 아니다. "조건이 달랐다면 나도 저럴 수 있다" 라는 냉정한 인식에서 나오는 태도다.
혐오를 피하는 방법은 "올바른 대상에게 탓 돌리기"가 아니라
탓의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라는게 초기불교가 내놓는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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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보니까 모르는 내용도 아닌데 체화에는 역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이거 situationism vs dispositionism 가지고 좌파우파 박터지게 싸우는 내용이잖아
시드니 스위니 good genes 논란에 대한 단상
시드니 스위니의 청바지 광고가 어그로를 끌고있다고 한다 - 유전자는 부모에게서 자식에게 유전되며, 머리색, 성격, 심지어 눈 색깔과 같은 특징을 결정합니다. 제 청바지는 파란색이랍니다 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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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