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세계에요

품위의 효능

유 진 정 2022. 2. 13. 18:39

 

 

며칠 전 자가항원 검사하러 보건소에 갔다. 줄이 정말 길었다. 총 1시간 40분을 추위에 떨며 기다려야 했다. 

내 앞엔 아주 잘 차려 입은 20대로 보이는 딸과 50대로 보이는 모녀가 서 있었는데 딸 쪽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특히 추워 보였다.

 

보건소 직원들도 매우 지쳐있었다.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대화하지 마시고, 전화 통화 자제를 부탁드린다며 다 쉰 목소리로 외치고 다녔다. 

그런데 이 모녀가 직원이 자리만 뜨면 자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말 지루한 기다림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나중엔 딸 쪽이 거의 웅변조의 하이톤으로 두서없는 독백을 허공에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니 저렇게까지 직원이 부탁하는데 좀 들어주는게 좋지 않을까요? 하니 딸은 아 네~ 를 외치고 빙글 뒤로 돌았다.

 

그 다음 행동이 재미있었는데 엄마 쪽이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 보더니 딸을 두 손으로 잡아 당겨 자기 앞쪽으로 옮겨놓았다. 동물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았다. 어미는 새끼를 적으로부터 떼어 놓습니다. 뭐 그런 나레이션 깔리고..

아무튼 그러다가 내가 폰 보면서 걷다가 모친 쪽으로 가까이 가니까 저기요 뒤로 좀 가주세요! 라고 지적을 했다. 지금까지 전혀 거리 유지가 안 되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그러는건 아까 기분이 나빴다는 소리겠지?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왜냐면 나도 지적할 때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조용히 말하긴 했지만 추워서 짜증이 잔뜩 나 있던 상태였고 속으로 참 정신머리 없는 여자네 라고 생각했다. 그 감정이 모녀에게도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상황에서 상대의 기분을 덜 상하게 하면서도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봤는데, 품위가 있으면 된다. 몇 년 전 독순언니랑 통화를 할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음으로 한달에 두번 정도 통화를 하는데, 통화시간이 길기 때문에 스피커 폰을 설정해놓고 다른 일을 하면서 통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언니가 밥을 하나 그래서 그런 식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언니네 문을 두들겼다. 언니는 잠깐만. 하고 문 쪽으로 갔다.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언니는 문을 열고 그 사람들의 말을 듣더니 그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들의 믿음을 존중합니다. ' 라고 인사한 뒤 그들을 보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언니의 태도가 너무 품위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이고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단어 선택이었다. 

나라면 일단 문을 안 열어줬을 거고 상대가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아 됐어요!!!!! 하고 들어왔을텐데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예전에 엄마와 버스를 타고 모 대학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였는데, 꽃무늬 미니 드레스를 입은 건장한 여대생 네 명이 버스에 올라탔다. 다리가 특히 굵었고 목청도 엄청났다. 

여대생들은 곧 맨 뒷자리에 주루룩 착석한 뒤 수다를 떨기 시작했는데 수다의 내용도 저열했고 일단 목소리가 커도 너무 컸다. 모친의 얼굴은 급속도로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좀 조용히 좀 했으면 좋겠어!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네에에에에엙!!!!!!!!!!!!!!!!!!

 

라고 사자후를 내질렀다. 심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쓰러질 수 도 있을 것 같은 데시벨이었다. (그 야 개짖는 소리 좀 안나게 해라 그 톤 상상하면 됨) 

버스 안은 바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입을 다물었고 학생들도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사람은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본인도 괴롭다.

엄마의 분노는 유용할 때도 있지만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불면증으로도 오래 고통받아왔다. 분노가 불면을 초래하는지, 불면이 분노를 초래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인듯

 

 

아무튼 그래서 나도 분노보다는 품위를 장착하고 싶다. 제일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도 효과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물론 품위라는게 저절로 생겨나는 건 아니고 자신의 감정을 다룰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겠지만..  

 

얼마전 담마코리아에 접수봉사를 하러 갔다가 수행을 오래한 여성 세 분과 밥을 먹었다. 

각각 스님, AT선생님, 번역하시는 분이었는데 포스가 매드맥스 할머니들을 방불케했다.

모두 장난꾸러기이시면서도 아주 품위 있는 분들이라는게 느껴졌다. 이 정도 의식수준을 갖추게 되면 사는게 참 편하겠다 깝치는 사람이 적을테니까..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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