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세계에요

무아윤회와 쇼펜하우어

유 진 정 2023. 6. 15. 01:00

 
(중략)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부정은 곧 개체화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마야의 베일, 즉 우주적 환상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나’라는 개체성의 환상에서 벗어날 경우에만 그 고통스러운 실존적 조건을 순간적으로 벗어나는 미적 관조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개체적 자아에 대한 인식, 개체화의 원리는 마야의 장막이자 환상이다. 그 장막을 벗어나야만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전 세계의 고통과 재난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될 경우에 그는 어떤 고통도 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동고’(同苦, Mitleid)의 감정이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생각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일치한다. 나 자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화의 원리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제 삶을 긍정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향락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이 해를 가해와도 대항하지 않으며, 마음속에 더 이상의 분노나 욕망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게 할 수 있다.

이제 쇼펜하우어는 영원과 시간, 존재 자체와 실존을 구분함으로써 의지를 부정한 사람들의 사후 존재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죽음은 일시적인 실존이나 개별적 인식의 종언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죽음은 우리 존재의 본질인 의지 자체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죽음은 단지 시간이 지배하는 것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작, 지속, 종말은 현상 세계에 속한 것이고, 따라서 죽음은 모든 개별 현상의 토대이자 사물 자체로서의 의지 자체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 존재의 은밀한 본질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개체의 상실이고 탄생은 새로운 개체의 시작이지만, 의지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인식 주체로서의 영혼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만이 윤회한다고 보았다. 의지는 새로운 탄생과 더불어 새로운 지성과 새로운 존재를 갖는다. 이것은 윤회보다는 재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새로운 탄생은 불멸의 의지 자체에 도달하려는 갈망의 표현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탄생을 통하여 정제되다가 결국에는 완전한 부정의 방식으로 자기완성에 도달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나와 세계가 표상이고, 그 배후에 의지가 도사리고 있으며, 삶의 의지의 긍정은 고통을 유발하므로, 고통을 벗어나려면 의지의 완전한 부정을 통하여 동고(同苦)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분명 불교의 중심사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가 불교 지식을 갖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1818년도 초판의 결론에서 의지의 완전한 부정을 통하여 완전한 신성(神性)과 만날 수 있으며, 고통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경우에 남은 마지막 일은 무(無)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라고 이미 언급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신성(神性)과 무(無)의 일치는 바로 불교의 열반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로제 폴 드루아와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불교와 쇼펜하우어는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불교가 실존적 한계를 진단하고 치유하는 치료술인 반면에, 쇼펜하우어의 의지부정론은 삶의 치유보다는 삶의 포기를 권장하는 염세주의이다. 그리고 불교가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극단을 회피하는 중도주의인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생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폐기하는 극단주의에 머무른다. 비록 쇼펜하우어가 낭만주의를 유대-기독교적 굴레에서 해방시켜 ‘신 없는 종교’, 즉 무신론적 신비주의에 도달하게 하였지만, 이같은 사실에서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차이는 엄존한다.
 
울산대 김진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4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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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개체의 상실이고 탄생은 새로운 개체의 시작이지만, 의지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

어디서 들어본 말 아님?

https://digthehole.com/4908

조화! 객관! 환원! 이론!

이름부터 수상한 이 이론은 내용도 수상함 우리의 뇌세포 안에 이런 폼롤러 같이 생겨먹은 미세소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저 미세소관에 양자적 정보(=의식)가 저장이 되

digthehole.com

이거랑 같은 말이잖음(양자적 영혼=의지)
1700년대 인간이 여기까지 생각했다니 넘 놀라움 

초기불교의 윤회는 환생과는 다른 개념임
나라는 자아가 존재해서 다른 몸을 입고 태어나는 그런 판타지 소설 같은 내용이 아니라,
불변하는 실체나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 의식의 흐름만은 계속 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될 듯함
 

< 나 자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 꼬사무이에서 만난 정신나간 피아니스트가 눈만 마주치면
유진, you are nothing! you are everything! 을 외쳤고 그 때마다 일행이 유진, 저래서 젊을때 약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되는 거야. 라고 투덜거린 기억이 나는데 피아노아저씨 히피 시절 대승불교 사상을 접하셨던 모양
 

 <인간은 ‘나’라는 개체성의 환상에서 벗어날 경우에만 그 고통스러운 실존적 조건을 순간적으로 벗어나는 미적 관조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You make me forget myself 라는 가사를 들을 때 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이나 미인을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들이 우리를 저 개체성의 환상에서 일순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함

왜 magnificent한 풍경을 마주하면 죽고 싶어지는 것일까, 초딩때 성산일출봉을 방문한 이후로 계속 궁금했었는데 개체성의 환상(=ego)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소멸에 대한 동경으로 발현되었던 것인듯
그런 맥락으로 보면 고엔카지의 농담대로 죽음은 일종의 승진이 아닐까?
(자살하라는 말 아님. 자살은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로써 엄청나게 부정적인 의식을 축적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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