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요

명상원에서의 10일은 번개처럼 지나갔다

유 진 정 2024. 4. 22. 22:21

침묵하는 동안 한심한 농담부터 꽤 진지한 내용까지 여러가지 단상들이 쌓였는데
나는 끊임없이 뭔가를 머릿 속으로 적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필요한 버릇이지만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게 만드는 주원인이기도 하다.

글 쓰는 사람들 정신병 걸리는 이유도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왔는데 (만화가들 황당한 사고로 잘 죽는 이유도)
동시에 작문은 미치지 않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블로그는 뇌 전용 클라우드이다. 여기에라도 좀 옮겨놓아야 내가 살지 

아무튼 코스에 대해서는 정리해서 다시 적어야겠고, 어제오늘 있었던 일이나 기록해 봐야겠다. 

12일만에 폰을 켜니 이00님 부친상 문자가 와있었다.
모르는 이름이었는데 위에 온 메시지들을 보니 3년전 중고거래를 했던 사람이다.
<택배비 부담하시면 48만원까지 해드리겠습니다.> 라는 나의 문자 아래로
<네 감사합니다. 연락주석요>
라는, 오타 덕분에 인간적이 된 답장이 와 있었다. 값이 꽤 나가는 걸 팔았네 싶은데 뭘 팔았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그분의 부친께서 소천하셨고, 덕분에 '혜량'이라는 단어의 용법을 배우게 되었다.
부고 링크를 클릭하니 국립정동극장 예술단과 농기계 상회 등에서 보낸 근조화환 사진들이 나온다. 
미약하게나마 고인의 이미지가 그려지길래 마음 속으로 짧게 조의를 표했다.

그 아래로는 실손보험 관련 연락을 달라는 우체국의 문자가 와 있었다.
실밥풀고 바로 환급신청을 했는데 뭐가 누락된 모양이다.
귀찮다고 생각하며 일요일을 보내고 오늘 전화를 거니
<본사에 보낸 서류가 반환되었고, 상해의 경우 법이 바뀌어 이제 사고 경위와 날짜 등을 자세히 적어야 한다>
는 내용을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직원이 읊었다. 조심스럽게 오늘 오실 수 있냐길래 바로 갔다. 

사고경위를 자세히 적어서 내자 반묶음 머리를 한 이미숙st로 세련된 중년의 직원이 아이고아이고 어떡해 혼잣말을 하길래 웃기죠 저도 웃겼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분이 사실 자기가 걱정을 계속 했다, 전화기가 꺼져있고 연락이 안 되셔서요.라는 말을 했는데
예상치 못한 사적 반응에 약간 충격받았고 바로 암보험 가입 권유하려고 친절을 베푸는 건가 의심이 따라왔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전거 타고 오면서 생각해보니 30대 여자가 (머리도 못 감고 추레했음) 머리 터져서 꼬매고
상해로 보험금 청구 후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음 -> 이게 아무래도 도메스틱 바이올런스 같은 것을 떠올리게 만든게 아닌가.. 

아무튼 그랬고

집 떠나기 전 주문한 코너 선반이 와 있어 설치를 하고, 까치발이 흰색인게 거슬려 검게 칠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해골을 올리고,
전동드릴 쥔 김에 구멍 몇 개 더 뚫어 거추장스럽던 거 다 걸어버리고,
옮긴 큰 방 명상 자리가 뭔가 맘에 안 들길래 가구들 이렇게 저렇게 옮겨 보고 최적화 시켰더니 하루가 간다.

아 시장보고 청소도 했구나 마트 갔다가 신기한 거 봤는데
수면바지 입고 머리 산발하고 염색 지저분하게 한 퉁퉁한 젊은 여자가
술 한잔 하고 친구랑 즐겁게 전화로 수다 떠는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울먹이면서 지갑잃어버렸다고 구걸하니까 아저씨가 뭔가 외계인과 조우한 듯한 표정으로 별 말 안하고 만원 꺼내서 여자 손에 올려 줌

나는 사기라고 거의 확신하는데 (타겟팅을 너무 귀신같이 잘 했고 언행에 연극적 요소가 있었음)
그래도 아저씨의 애티튜드가 뭔가.. 특히 말을 안 한게 되게 괜찮다고 생각했음
아저씨가 청자켓에 베이지색 깨끗한 스케쳐스 신고 있던 것도 기억에 남는데 딸이 있거나 부인이 잘 챙겨주나 싶었음  

속세로 돌아오자 마자 두통이 시작되었는데 헬스장 가서 뛰고 들고 하다보니까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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