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 생로병사

유 진 정 2025. 12. 26. 15:48

목욕에는 의식적인 면이 있다. 셀프 세례를 주고자 사우나에 다녀왔다. 
오늘 영업하시나요? / 저희는 쉬는 날 없습니다. 
여주인의 목소리에서 당당함이 느껴지는 유서깊은 동네 목욕탕이다. 

오래된 맛집처럼 목욕탕도 잘 되는 곳은 로비에 쓸데없는 장식품들이 여럿 놓여져 있다.
아니 부와 잉여의 과시이니 쓸데가 없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아무튼 여기에는 물레방아와 수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들어가자 마자 할머니들의 여기가 아프고 저기가 아프다 레파토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42번 락커 앞에는 낮은 위치에 거울이 걸려있어 스스로의 몸을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공중탕에 갈 때면 시선을 느끼게 되는데 아마 문신 때문일 것이다.  
체중을 재고 샤워를 한 뒤 탕으로 들어간다.

탕의 중앙에서 jello같은 형태로 물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아름답다.
위에서 보다가 얼굴을 반쯤 물에 잠기게 집어넣어 시야를 바꾸어 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인공암반과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90년대의 영화가 느껴진다. 

여자들의 육체가 돌아다닌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새댁의 단단한 형태부터
출산과 육아의 의무를 마친 백전노장같은 형태까지
세월이 새긴 흔적들로 바위 같고 산맥 같아진 그들의 몸은 그려보고 싶게 생겼다.
솟아오르는 물에 다시 시선을 고정하고 앞에 앉은 중년 여성들의 대화를 듣는다. 

노인네가 자기 나이먹은 건 모르고 노인들 싫다고 노인정엘 안 나갔다는 거야
근데 나이 먹으면 누가 좋아해 그러니까 맨날 집에 있는 거지
아들은 뭐 좋은 직장 다닌다는데 가까이 살면서 찾아오지도 않는데
딸이 아침마다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안 받더래 그래서 아들한테 가 보라고 한거지 
아들이 이제 퇴근하고 가봤더니 이렇게- 이런 자세로 목욕하고 나와서 바로 쓰러진거야.
119불렀는데 늦었대 그렇게 갔지 뭐 그러니까 나이 들수록 친구가 중요하다는 거야 아유 세월이 너무 빨라

때를 밀고 모래시계가 놓여져 있는 건식 사우나로 이동한다.
얼굴에 수건을 올리고 시체처럼 드러누우니 들려오는 새로운 대화

아유 우리가 40년을 같이 살았더라 더 살아봤자 20년 30년이야
그 중 3분의1, 10년은 잠으로 보낼 거 아냐
신랑한테 말했더니 그래? 열~심히 돌아다녀야 겠네 이러더라 (웃음)
그것도 몸이 건강해야 돌아다니지
아니 우리 옆집 양반이 어느날 부터 안 보이는 거야 신랑이 전에 119오는 걸 봤다네
그래서 할머니한테 할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물어보니까 하늘나라 갔어요 그때 가서 안 돌아와 하더래
아직 여든밖에 안 된 양반이..

그 보살님은 이번에 백수 했다더라 아유 백수 대단하네
맨날 집에서 새벽에 일어나서 경전읽고 그러니까 오래살지 
근데 백수는 솔직히 안 하는게 맞지않아? 그렇지
아니 그 아래에 아들 딸 계좌번호가 적혀있더라고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아들딸도 나이가 몇인데 그거 냈다가 나중에 어떻게 받을 거야 말도 안되지 
아유 아무튼 세월이 너무 빨라 벌써 연말이야 

고문실 같이 생긴 습식 사우나에 들렀다가 냉탕에서 수영 좀 하고 나왔다.
다시 채중을 재니 무엇이 빠져나갔는지 500g 줄어있다.
틀어져 있는 동물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을 들으며 옷을 하나씩 입는다. 

죽고 죽이고 먹고 먹히는 것은 순환입니다
들쥐들의 짝짓기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숲에서 가장 많이 잡아먹히는 이들이 모처럼 맞는 평화로운 밤입니다
암컷 올빼미는 새 둥지가 꽤나 편안한 모양입니다
눈처럼 새하얀 알을 두 개 품고 있습니다 수컷은 경계를 섭니다
여우의 새끼가 태어났습니다. 삶의 기적은 이렇게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