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전시장은 한가해서 좋다.
에리히 프롬 책을 읽고 있는데 머리가 노란 여자분이 슥 들어와 급히 책을 찾는다.
싸인해 드릴까요 하고 매직을 드는데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닌 거 같기도 한데 누군지는 또 모르겠고
아 한 권은 켄타로 에게 라고 써주세요. 켄타로? 이렉션즈 멤버? 아 네 다음 달에 일본가는데 켄타로가 다른거 필요없고 이것 좀 꼭 사다 달라고 했어요. 켄타로 그 머리 이렇게 이렇게 된 사람 맞나?? 아 네
그러다 알게 된 것은.. 일단 18년 전으로 돌아가서.
홍대 놀이터에서 죽치고 앉아있는데 웬 초등학생이 나타났다.
당시 밤의 놀이터엔 장애인, 외국인, 사기꾼, 막걸리 아저씨, 리코더 부는 굿바디 언니 등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 상주했지만 초등학생은 처음이었다.
공연장 놀이터 등 펑크족들 나와바리에 들락거리던 그 소녀를 누군가가 초펑(초딩펑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초펑은 혼자가 아니었다. 중펑과 함께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중딩보단 초딩이 아무래도 임팩트 있었기 때문에 중펑의 존재감은 살짝 묻힌 감이 있었다.
노란머리 여성은 그때 그 중펑이였다.
어른이 된 중펑은 마치 친척 모임에 참석했던 아이처럼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청소년의 예민한 뇌에 기록된 추억들을 고맙게도 공유해 주었다.
처음 중펑을 놀이터에서 만났을때 내가
' 이런데 나오지 말고, 여기서 남자 만나지 말고, 사채꾼 우시지마를 꼭 읽어라. '
라는 훈계를 했다는데 기억은 안 나지만 너무 내가 했을 법한 말이라 개웃겼다.
아무튼 중펑은 사채꾼 우시지마를 읽었고, 계속 공연장에 왔으며, 어른들의 어두운 면들도 보고,
문신은 많아졌지만 술은 절대 안 먹고, 감자탕집 하다가 정리를 했고, SNS는 안 하며, 씬에서 만난 드러머랑 결혼도 했다고 한다. 3년차 기혼인데 아직까지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다고!!
참고로 내 빅데이터에 따르면 밴드남 중엔 드러머가 그나마 젤 낫다. 그 다음은 베이스 (베이스 보컬 제외)
기타랑 보컬남 ㅈㄴ토나옴 참고로 난 보컬만 만났음
아니 근데 진짜 드러머 중에 보살급 인내심을 지닌 상남자들이 가끔 있단 말임 이유가 뭘까?
자기를 덜 드러내는 포지션을 선택한다는 게 뭔가 성향과 연결되나?
물론 아웃라이어는 존재하니 포지션으로 인간을 판단하진 맙시다^^
아무튼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하다 보니 돌아가신 분들 이야기도 나오고 그러다 보니 세시간이 지나버렸고
서로 사진 한장씩 찍어주고 작별했다.
사진 속 사람들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중펑의 눈에 감정이 자글자글했다.